최재천(변호사)

 
 

삼성가의 소리 없는 방문
정당 대표나 현직 장관도

어느새 해남은 미황사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진리, 
실천하는 깨달음이 금강스님

달마산 미황사 금강스님은 벌써 7주째 금요일 마지막 밤 기차에 오른다. 다음 날 아침 북한산 기슭 어느 사찰에서 열리는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49재를 집전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해서 스님은 삼성가의 장례 의식을 집전하게 되었을까.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은 이랬다. "너희(제자)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에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인간이라면 오로지 진리에 기대야 한다. 이 땅에 더 이상 부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승이건 속이건 의지해야 할 것이라곤 오로지 부처님의 말씀이다. 말씀은 어디에고 존재한다. 서울 땅에도, 해남 땅에도, 대흥사 스님들의 마음속에도,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자리한다. 먼지 잔뜩 낀 거울이라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절을 찾는다. 부처님의 본 모습을 만나고 싶어서다.

그런데 '쇠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피하지 못하며, 흙으로 만든 부처는 개울을 건너지 못한다.' 결국은 내 마음속의 부처에 의지해야 하는데 우리의 '몸뚱아리'는 보리수가 아니다. 바로 그 시간, 바로 그 곳, 깨달음이 길 잃은 곳에서 진리에 목마른 시간에 우리들은 산사로 고승대덕을 찾아 나선다. 돌사자 같은 안내가 필요하다.

달마산 미황사에 가면 마치 '깨어진 신라 와당'처럼 맑은 웃음을 짓고 계신 금강스님이 있다. 삼성가는 오래 전부터 소리소문 없이 해남 땅 금강스님을 찾곤 했다. 흔적 없이 내려와 스님이 내어주는 차 한 잔 마시고 올라가곤 했다. 고 이건희 회장이 세상을 뜨자 유족들의 청에 따라 금강스님은 장례기간 내내 장례식장에서 함께 기도하고 장례의식을 집전했다. 최근 미황사에 다녀온 사람들은 알 것이다. 없던 석불과 석탑과 석등이 새롭게 배치된 것을. 몇 개월 전 삼성가의 한 분께서 시주불사한 흔적들임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부처님과 달마산 산신은 알고 있다.

몇 해 전부터 고향이 해남이라고 답하면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땅끝 미황사에 자주 가셨겠네요. 금강스님 아세요?" 해남은 더 이상 땅끝이 아니다. 막걸리도 아니고 고구마도 아니다. 어느새 해남은 미황사다. 그곳에 계신 부처님이다. 하지만 쉬운 진실은 다르다. 사람들에게는 살아있는 진리, 실천하는 깨달음 금강스님이다.

얼마 전 물러난 어느 정당의 대표는 총선이 끝나자마자 다음날 미황사로 향했다. 간간이 스님께 차 한 잔 얻어 마시고는 며칠 동안 틀어박혀 있기만 했다. 초행길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현직 장관 여럿도 금강스님만이 유일한 위로다. 어느 언론사의 회장 또한 미황사 다녀가는 것만이 유일한 일탈이자 치유다. 수많은 시인들, 여러 국적의 학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대중 혹은 클래식 연주자들이 미황사를 찾는다.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중 하나는 어느 해 여름 미황사에서 녹음됐다. 그랜드 피아노를 옮기느라 힘이 들었다고 했다. 세계적인 영성가들도 서툰 영어와 독일어의 금강스님을 찾는다. 진리 앞에서 무슨 통역이 필요하겠는가. 대체 스님은 어떤 선지식이길래, 어떤 깨달음을 나누어 주길래, 어떤 안식과 위로와 영성과 치유를 함께 하길래, 굳이 금강스님을 찾는 걸까.

고등학교 때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잠시 출가를 결심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치열함이라고는 거리가 먼 치기였다. 법정스님이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성북동 길상사에서 법정스님을 뵌 적이 있다. "고향이 해남입니다.", "나는 우수영이요.", "예, 잘 알고 있습니다. 평생에 한 번은 뵙고 싶었는데 기쁨입니다.", "그래요. 늘 기도하며 잘 살아야 합니다." 법정스님의 고향 해남 땅에서의 스님에 대한 기념사업은 지금 누구의 일이 되었을까. 왜 법정스님은 돌아가시기 며칠 전 직계 제자도 아닌, 송광사 출신도 아닌, 그것도 백양사 출신의 금강스님을 서울로 불러 여러 당부를 하셨을까. 법정스님을 마지막으로 모시던 법사 부부께서 스님의 유품 전시회를 기획했을 때 그 일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법정스님이 돌아가신 다음 다비장이 끝났을 때, 금강스님의 제자들 중 일부는 스님의 사리를 고향 땅 해남 미황사에 모셨다. 그래서 법정스님은 해남 땅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미황사에서는 매해 법정스님 기일에 재를 모시며 법정스님의 말씀을 되새긴다.

출가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이자 비움이요, 끊음이다. 절대적 단절이다. 그리하여 진리의 바다에 풍덩 뛰어드는 일이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절집에서는 문중이라는 특이한 관계 논리가 강화되는 추세다. 가족관계를 끊고 출가를 해 이제 와서 새로운 가족관계를 창설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그것이 소유와 지배와 연결된다면 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언젠가 미황사에 갔을 때 눈 푸른 가톨릭 성직자 한 분이 경내를 산책하고 있었다. 궁금했다. 기억해 두었다가 스님께 물었다. "독일의 신부님입니다. 우연히 미황사와 저를 알게 되어서 인터넷을 통해 템플스테이를 신청했답니다. 서울에서 기차로 목포에 와서 다시 버스로 해남에 와서 다시 버스로 미황사 앞에 내려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두 달 계실 겁니다. 한글도, 한국말도 하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재밌지요." 왜 하필 수많은 불교 국가 중에서 한국이고 그것도 달마산이고 그것도 미황사인지, 왜 특별히 금강스님을 찾아 진리의 말씀을 나누고 싶었는지 묻고 싶었었다.

그렇다. 스님은 더 이상 미황사의 스님이 아니다. 달마산의 산승이 아니다. 미황사가 해남의 상징이 되었듯 금강스님은 속가 사람들에게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스님의 동그란 체구와 동그란 얼굴과 동그란 웃음이 보여주듯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누구에게나 열린 진리가 되고 있다. 교통도 편하고 대중을 위한 시설이 잘 되어 있는 수많은 사찰들이 수도권에는 즐비하다. 그렇다고 스님이 특별히 조계종단에서 대표성 있는 직책이나 역할을 맡아 하지도 않는다. 도망치듯 늘 회피하는 쪽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서울에서 가장 먼 땅끝 해남 달마산 미황사를 찾는다. 왜 그럴까. 그곳에는 금강스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진리에 가장 충실한, 가장 가까운 금강스님이 바로 미황사에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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