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탁(향우)

 
 

나는 현산에서 태어나 지금은 경인 용인에 살고 있지만 매년 한 차례 해남을 찾는다. 얼마 전에 마음먹고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김 시인과 같은 고향이자 동년배로서 동 시대를 살고 겪으면서 항상 부채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60, 70년대에 낮은 쌀 가격 정책으로 농촌이 피폐해지고 전태일 열사처럼 도시 노동자들이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힘들어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또한 70년대의 엄혹한 유신 독재와 80년대의 5·18 광주민주항쟁에 신군부의 등장으로 인권이 짓밟혔을 때에도 용기가 부족해서 김 시인처럼 시대에 맞서 치열하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김남주 생가를 쉽게 찾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비게이션에 의존하지 않고 국도에서 김 시인의 생가로 접어든다는 첫 안내판을 본 후 마을길로 계속 들어갔는데 도대체 얼마쯤 더 가야 김 시인의 생가가 나타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안내 판 한두 개 더 세우는 게 그렇게 힘들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다음. 생가가 화려하게 단장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너무나 초라하고 썰렁한 분위기였다. 세칭 '기념공원'이라고 조성된 곳을 보니 늘어선 시비들은 빗물에 흘러내린 녹물 자국으로 읽을 수 없고, 체험공간으로 마련했다는 김 시인이 갇혔던 모형감옥의 쇠 문고리는 부서져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방치 상태였다고나 할까.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즐겁고 부드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 자연의 혜택을 인위적으로 차단하고,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너무 비좁고, 쥐며느리, 지렁이 등 불결한 벌레들이 너무 많이 기어 다녀 독서에까지 지장을 주는 관 속 같은 0.75평방'에 가두는 일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그 잔인한 벽 속의 세계에 대하여 김남주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곳에 처넣어 두면 소도 말도 개도 다 죽습니다. 닭도 오리도 죽습니다. 그렇지만 유독 사람만은 살아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장석주의 '나는 문학이다' 708쪽)

시인은 생전에 가수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로 시작하는 노래다. 나는 객지로 떠난 지 오래 되었지만 몸이 어디에 머물러 있건 나에게 고향은 언제나 고향이라서 젊은 날에는 오기택의 '고향무정'을, 나이가 더 들어서부터는 남상규의 '고향의 강'을 십팔번처럼 부르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고향에 가면 아랫목처럼 따스했던 고향 대신 인정이 메말라간 고향의 풍경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물론 해남이 자랑하는 녹우당과 윤선도 기념관도 좋고, 우항리 공룡박물관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작가는, 문인은, 시인은, 예술가는 어디에 있는가.

시인의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은 노무현 정부의 이창동 장관 때 예산까지 편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허나 무슨 까닭인지 사업은 축소되고 관리조차 되지 않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2007년 5월만 하더라도 '뉴스투데이'지에 의하면 인터뷰에서 김경윤 기념사업회 회장은 김남주 시인은 "굉장히 귀중한 문화적 자산인데 그동안 소홀했고", 당시 해남군청 문화관광과 서해근 과장은 "청소년들에게 민족사를 가르칠 수 있는 체험공간"이라고 말해 해남군민의 가슴을 한껏 부풀게 했는데….

생가 안채에는 '민족시인 김남주 생가'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라고.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떠난 해남읍 녹우당길 땅끝순례문학관 앞뜰에는 '사랑은'이라는 시비(詩碑)가 이렇게 간절히 외치고 있다.'사랑은/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사과 하나 둘로 쪼개/나눠 가질 줄 안다/너와 나와 우리가/한 별을 우러러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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