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농부)

 
 

해남읍에서 일을 보려고 오소재를 넘어가려면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고 천천히 움직여야 할 정도로 앞이 잘 안 보이게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들이 있다. 천천히 가면서 혹시 반대편 차량이 불쑥 나타날까 봐 조심스럽게 운전하게 된다. 이런 안개 낀 날, 차량은 대부분 저속 주행을 하기 마련이다. 물론 속도가 좀 빠르다 싶은 차량도 몇 있기는 하나 그런 차에 신경을 쓸 틈도 없이 안개를 헤쳐나가야 한다.

바다에 안개가 끼면 배들은 어떻게 움직일까. 바닷가 어른들이 하는 말은 "움직이지 마!"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낀 바다에서 내비게이션을 보고 배를 움직여도 사고를 일으킨다. 낙지잡이 나가서 많이 경험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조용한 날, 바람이 없는 날, 조금물때를 잡아서 나온 낙지잡이가 안개 속에 갇히면 그냥 조용히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한다. 급한 마음에 움직이면 몸만 더 피곤해진다고 한다.

'움직이지 마'가 침몰하는 세월호에서는 수백 명의 어린 청소년을 수장시키는 악마 짓을 했지만, 때론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조용히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있는 여유를 찾아주는 격언이 된다. 대기업 면접관들이 가장 크게 경계하는 인물은 멍청하면서 부지런한 인물이라고 한다. 소위 '멍부'로 표현되는 인물은 자기를 너무 앞세우거나 무언가 조바심에 실적 올리려고 이것저것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무조건 부지런히 뛰다가 회사에 피해를 주는 유형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복지부동을 예찬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일하면 됨을 알면서도 지적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움직이지 않는, 귀찮게 일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 그런 모습은 태만일 뿐이다. 일하다 보면 가장 어려운 상황은 반대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다. 아무런 자기 의견이 없는 이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훼방 놓는 태업을 하는 것이다. 그저 자기 편한 부분에만 집착하여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멈추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식사할 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말한다. 자신들의 주변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말이다. 불교인들이 식사할 때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라고 말한다. 평소에는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다가 절에서 의식을 갖출 때만 그렇게 말한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으면 구업이라도 덜 짓지 않을까.

주꾸미와 낙지철이 돌아왔다. 낙지로 유명한 내동 바닷가의 상황이 예전만 못하여 낙지가 많이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갯벌 낙지가 부드럽고 쫄깃하다지만 잡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바다를 메운 간척지 사업의 영향과 축산분뇨의 영향이라고 한다. 동네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움직이며 갯벌로 나간다.

사람은 뒤돌아볼 때마다 어른이 되어간다고 한다.

세상은 좋은 사람 90%와 나쁜 사람 10%로 구성되어있다는 9:1 속설이 있다. 10%가 여론을 좌지우지해도 90%는 조용히 움직인다. 그리하여 10%가 51%가 되지 못하게 막아준다. 돌아보면 나는 때때로 10%에 가담하였고 가끔 90%에 가담했었다. '가만히 있었을 것을'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알지 못하면서 말한, 모르면 침묵했을 것을 하고 후회한다.

인생이 기우는 무렵, 뒤돌아보면 '나는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높여 대우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안개 낀 바다에서 나만 움직이려고 모두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한 적은 없을까.

움직이지 않을 때를 알고, 침묵할 때를 아는 삶,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이치다. 언제나 이에 못 미치는 삶을 살면서 늘 후회하면서도 삶이 기울어가는 즈음, 나에게 일어난 모든 결과는 과정이었음을 알기 시작했다.

이제라도 나를 돌아보고, 늙어가는 삶이 아니라 익어가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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