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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3>역사로 본 황칠-두번째 이야기
정순태(황칠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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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2.04.2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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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 속에서의 황칠

중국의 신당서를 비롯하여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서적들을 살펴보면 황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곳곳에 실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①新唐書 - 有三島 生黃漆 六月刺取 藩色若金
백제에 세 섬이 있다. 황칠이 나온다. 6월에 상처를 내면 금과 같은 액이 나온다.
②通典 - 國 西 南 海 中 有 三 島, 出 黃 漆 樹 ,似 小 ? 樹 而 大 . 六 月 取 汁 . 漆 器 物 若 黃 金 ,
백제 서남해안에 세 섬이 있다. 나무에서 황칠이 나온다. 종수는 작으나 큰 편이다. 6월에 칠을 딴다. 칠을 하면 황금색이 난다.
③冊府元鬼 - 당나라 태종은 백제 의자왕 9년에 사신을 보내서 백제에서 채취한 금칠인 황칠을 수입하여 이를 철갑에 칠하였던바 모두 황자색을 띄고 있으며 햇빛에 비치면 금색이 찬란, 또한 오채와 양현금으로 산문갑을 만들었다. 산문갑은 오채와 현금을 가지고 단청을 그린 후 그위에 황칠을 했다.
④高麗圖經 - 황칠이 나주의 조공품이라는 기록이 있음
⑤海東繹史 - 중국 황칠의 기록들을 모은 책
⑥林園經濟誌 - 안식향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음
⑦鷄林類事 - ‘절강성 사람들은 신라금칠이라고 부른다'
 위 사료들은 황칠이 ‘중원의 통치자에게 바쳐지는 백제와 신라의 귀한 조공품'으로만 기록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황칠의 친정인 삼천리 금수강산 역시 공납을 바치는 주체로만 인식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강대국은 여전히 Big brother로서 약소국들과의 ‘상호협력'을 허울 좋게 내새우고 있지만 적어도 황칠을 보살피고 발전시켜 나간다해서 九族을 멸하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걱정은 접어두게 되었다.
 이제 황칠은 한반도가 강대국들에게 큰소리 칠 수 있게 만드는, 얼만 않되는 소중한 비밀병기중 하나임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면 인해전술의 중국을 상대하는 일이 그리 두렵지만은 않게 느껴질 것이다.

장보고대사와 황칠

 중국 진나라 시황제 시절. 경향각지에서 古名을 날리던 여덟 신선이 집단으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들이 바다를 건넌 곳에 지금도 ‘八仙過海堂'이라는 사당을 지어 여덟 신선을 기리고 있다하니 오늘날 같으면 신문의 헤드라인에 ‘八仙蒸發'이라고 실릴, 큰 사건이 아닐수 없다.
 그들이 천하를 떠난 것은 봉래(蓬萊)를 찾아서이다. 황해 건너의 바다 가운데 있는 이상향이라고 역사 이래로 구전되어진 그 봉래를 찾아 홀연히 사라졌던 것이다. 봉래를 찾아 떠난 이들은 비단 여덟신선만이 아니었다.
 촌로, 아낙, 장정 할것없이 시황제의 폭정과 노역에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코자 봉래로, 봉래로 떠났다.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도록 유민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자 한무제(武帝)는 궁여지책으로 산동반도의 동북쪽 연대(煙臺)지방, 옛 신라관이 있던 아름다운 해변지역을 등주(登州) 대신 봉래라는 이름으로 고치기까지 했다. 그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는지 아예 한반도 전체를 중국의 속국으로 삼으려고 고조선 땅에 수륙양군 이용해 한사군의 일부를 설치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나룻배에 몸을 싣고 하염없이 봉래에 다다르기만을 기도하며 바람에 목숨을 맡긴 이들은 조그마한 반도국의 서남해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으리라. 그곳이 그들에게는 봉래이자 천국이었다. 어떤 이들은 처음 발을 내디딘 고을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국의 문'이란 뜻의 "海南(하이난)!"을 기뻐 외쳤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선조들은 한반도, 특히 서남해가 바로 봉래임을 알았기에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부르며 무수한 외침 속에서도 꾸준히 자신의 터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 선조들 중에는 과거 천하로부터 봉래를 찾아 떠났던 산동, 요동, 한반도를 잊는 노철산수로(老鐵山水路)를 되집어서, 한반도 봉래의 보물들을 가지고 천하로 떠날 광대한 꿈을 꾸고 또 실현시킨 분이 있었다. 바로 장보고대사이다. 절강성 영파사지 기록에 의하면 장보고대사가 천하에 선보일 한반도 보물 중에는 황칠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까지는 중국 황실의 명을 받들어 전량을 공납으로 바쳐야 했지만 장보고대사로 인해 공납품이 아닌 교역품으로서 황칠이 중국으로 수출된 것이다.
 장보고대사가 말 그대로 ‘海上王'으로 군림하였을 시기만큼은 황칠이 禁漆이 아닌, 金漆로서 진정한 가치를 발할 수 있었다.
 흔히 해남을, 특히 갈두를 땅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에게 해남은 ‘천국의 문'이며 갈두는 ‘칡의 머리'였다. 머리로부터 뻗기 시작하여 담대하고 멋들어지게 오대양 육대주로 자라나는 봉래의 칡, 바로 그 칡머리가 해남이였고 한반도 서남해안이었다. 황칠이라는 고유의 보물을 있었기에 더욱 배포 유하게 칡 줄기를 펼쳐 나갔었던 것이다.
 ‘땅끝'이라는 이름으로 정감을 느껴야하는 요즘의 해남. 다시금 천국의 문으로, 칡 머리로 찬란한 재도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이쯤에서는 보일 법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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