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농부)

 
 

'좋은 술은 시골 벽촌에서 난다'(高酒出僻村)는 말이 있다. 어언 백년의 역사를 눈앞에 둔 해창주조장. 유기농 찹쌀로 빚은, 인공 감미료가 전혀 없는 막걸리를 전국 제일의 프리미엄급으로 승격(?)시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거기에 가면 정원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고양이들, 50마리가 넘는 고양이들이 있다. 그 중 이름을 가진 놈들은 겨우 서너 마리에 불과하다. 해창주조장 사장이 점찍은 놈들만 부르기 쉬운 이름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이눔의 시키들'이다. 이눔의 시키들은 서로 사이좋게 아옹다옹 지내며 여기저기 드러누워 해창주조장의 빼놓을 수 없는, 동물 사랑의 풍경을 만들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재확산되고 있다. 이웃 간 거리 좁히기가 다시 규제를 받기 시작했다. 이러다 이웃사촌은 사라지고, 포근한 정나미가 드러누워 쉬었던 자리에 비대면(非對面), 익명의 이웃들만 활개 칠까 걱정이다. 오래도록 괴롭히는 만성질환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인간적 정서를 메마르게 한다. 8개월 가까이 우리 곁에서 괴롭히는 만성 전염병, 코로나 바이러스. 지금까지는 백신도 치료약도 없다. 코로나 K-방역은 철저하게 서로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의 믿음과 공동체 약속 하나만으로 지켜지고 있다. 그 방역이 성공하려는 순간마다 어처구니없는 인간 군상들로 인하여 덜컹거리다가 드디어는 재확산을 맞이하게 됐다.

그 재확산을 주도한 소위 빤스 목사의 독재 타도를 듣고 세월이 참 빨리 갔음을 느낀다. 30여 년 만에 다시 듣는 구호가 우울함 가득한 언어로 다가올 줄이야. 그들은 군부독재를 무너뜨린 과거의 민주화 운동과 국정농단을 바로잡은 촛불 혁명에서 오자와 탈자까지도 부도덕하게 베꼈다. 껍데기만 닮은, 독재 시대의 유물들로 내용을 가득 채운 민주주의의 가면을 쓰고 그들은 오리지널 민주주의를 독재라 부르고 있다. 불의를 강요하고 탈법을 강요하는 그 자체가 비인간적이고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다.

새삼 민주주의를 가슴에 새겨본다. 한 사람이 권력을 독차지한 세상이 아니라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이 민주주의의 세상이다. 나라의 주인이 '이눔의 시키들'이다. 몇몇 이름을 날리는 자들이 주인이 아니다. 여론을 쥐락펴락하는 몇몇 언론이 주인이 아니다. 묵묵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주어진 환경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시민들이 주인이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인간이다. 물질이 아니다. 시대가 잔인해져 가고 있다. 독재를 부르고 있다. 혐오 언어가 남발되면서 불신을 조장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적은 독재만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다양함을 파괴하는 반민주적인 것들, 민주주의가 누리는 다양한 질서와 평등을 사적인 창고 안에 가두고 독점하는 것들이 모두 민주주의의 적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관리하기가 무척 어렵고 고단하다.

극단주의자들이 요란하다고 해서, 그들이 엉터리 군상들이라고 해서 당장 제압하려는 마음으로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폭력을 부를 수는 없다. 폭력은 매우 쉬운 방법이지만 잔인한 인간성을 요구한다. 절차대로 법에 의거해서 처벌하면 된다. 민주주의는 쉽게 오지도 않지만 유지하기는 더욱 어렵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지켜야 한다. 시련을 겪는다고 경쟁심이 발동해서 저들이 엉터리로 베낀 민주주의를 복사하여 닮아가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그러다 어느새 그들과 같은 괴물이 된다. 오리지널 민주주의가 뿌리 깊게 자라도록 해야 한다. 4년여 전 '이눔의 시키들'이 전국의 민주주의의 광장에서 촛불을 켜고 만세를 불렀다. 그 아름다운 촛불은 허약하지 않다. 그 광장에서 다시 슬픔을 딛고 민주주의 만세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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