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률(교사, 시인)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들이 뒤죽박죽인 세상이다. 한편으로는 사실로 여겼던 것들이나 또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거짓으로 판명되거나 거짓일 수도 있겠다는 다소 유연한 태도를 갖게 해주었다.

이 바이러스가 인류를 공격하면서 수많은 비난과 걱정의 주범이기도 하였지만 신기한 것 중 하나는 왜 하필 인간만을 콕 찍어 공격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인류에게 두려움의 가장 깊은 지점이다. 도대체 왜 인간만을 선택해 공격하는 것일까?

필자는 이것을 인간에게 보내는 경고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오만과 인간에게 한정된 지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 나아가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소수에 의한 지식의 독점과 그 독점을 이용한 횡포(이것은 잔인한 폭력이었다)에 대해 태도를 바꾸라는 것은 아닐까? 그 위대하다는 과학을 통한 법칙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부정되어 왔다.

지금의 어떤 논리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정될 것이라는 게 그동안의 역사는 말하고 있다. 코로나는 그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온 것은 아닐까? 어쩌면 신을 대신하여 온 것인지도 모른다.

7월 중하순이면 학교마다 기말고사를 본다고 난리다. 굳이 난리라고 표현한 것은 대체 저 놈의 시험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기에 학생이나 그 가족들이나 학교나 사교육업체 등 사회의 한 축이 초긴장 상태로 접어드느냐고 하는 소극적 조롱이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대부분의 시험이 정답 골라내기나 정답 풀어놓기나 정답 따라해 보기 정도이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가 숨어있다. '과연 그게 정답이야?'라고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그 정답이란 게 교과서를 집필한 소수의 의견이거나 그 소수의 입맛에 맞는 몇몇 이론가의 주장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하나의 문제에 대해 다른 생각은 수없이 많을 것이고, 그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 사회를 다양하고 재밌고 행복하게 하는 근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소수의 생각에 세뇌당해야 하는 걸까? 이것은 지식 독재, 지식 폭력일 뿐이다.

이런 폭력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하나의 예를 더 들자면 서점에서 수시로 발표하는 베스트셀러 문제다. 이 베스트셀러는 매우 폭력적인 상술이며, 소수 기득 작가의 독과점으로 다양한 창작을 가로막는 반문화 행위다.

그 작가의 생각도 수많은 생각 중의 일부일 뿐인데, 다른 생각의 전파를 가로막는 매우 불온한 상술인 것이다. 마치 그 생각으로 획일화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또 작가를 영웅시 하며 다수 대중의 생각이 따라가야 하는 무엇인 것처럼 몰아가는 매우 저급한 폭력일 뿐이다.

필자는 학생들과 수업을 하며, 정답을 부정하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왜 그게 정답이어야 하는지 질문하기를 요구한다. 왜 교과서 내용을 암기해야 하는지, 교과서는 믿을 수 있는지, 왜 수학 공식에 맞춰 문제풀이를 해야 하는지, 과학은 인류의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지, 나아가 학교공부가 우리의 미래를 이끌 수 있는지…. 끊임없이 물어보기를 강권한다. 그래서 늘 우리가 하는 수업은 '왜?'라는 질문이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기를 바란다. "그래도 돼요? 그렇게 하면 혼날 거 같은데…." 질문 기능을 거세당한 우리 청소년들을 상상해 보라, 이것은 지옥이고 노예의 세상이다.

시험을 안내하며 늘 제시한다. "선다형은 객관식이 아닙니다. 선다형 출제를 해야만 하는 내가 애처롭습니다(이런 고민 속에 교육당국은 서술형이나 논술형 출제를 20% 이상 강제하고 있다).

대신 내가 출제한 문제에 대해 나를 설득시키면 바로 정답으로 처리합니다. 내가 출제한 문제는 나의 견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암기하는 사람에게 불리하게 출제하고자 노력합니다.

평소 독서를 많이 한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주로 내용 이해를 다루며, 현실의 다양한 사례를 예시문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러 문제에서 꼭 나를 설득시켜 주기를 바랍니다." "뭐야…, 뭐 설득만 시키면 되는 거야?" "그럼요. 물론 근거와 논리로 나를 이겨주세요. 매우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아이들은 재밌어 한다. 그래, 애들아! 의심하고 질문하며 즐겨보자. 새 세상 새 주인의 탄생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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