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천(두륜중 교사 전교조 해남지회장)

 
 

88올림픽이 열리던 해, 지금은 명문학교라고 대접받는 어느 신설 사립고등학교에 부임했을 때는 1987년 6월 민중항쟁 승리의 여파로 온 세상이 들끓고 있었다.

비록 야당과 민주화 운동 진영의 분열로 정권이 다시 군부독재 잔당에게 돌아갔지만, 전국에 걸쳐 노동자 민중의 요구가 분출하였고 학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전 해에 결성된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의 영향으로 내가 부임한 학교에서도 평교사 협의회가 만들어졌고 교재 채택료 거부운동, 촌지 받지 않기 운동 등 학교 안에서 작은 실천들이 이어졌다.

이런 실천운동 속에서 전교협은 교육악법 개정운동과 교직원노동조합 설립을 선언했다. 교사들이 노동자라고 선언한 것은 당시 우리 사회에서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노동자는 앞에서 '산업역군', '수출일꾼'으로 포장되었지만, 속으로는 저임금에 무시 받는 '공돌이'였다. 전태일 열사가 자신을 불사르며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친 지 20여년이 지났어도 노동자들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사들의 노동자 선언은 전국을 달구던 노동운동에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손쉬운 홍보 하수인쯤으로 여겼던 교사집단이 당당히 권리 선언을 한 것이어서 정권의 당황과 히스테리도 대단했다.

'교원노조 분쇄' 대책이라는 것을 마련해 온 나라의 권력기관이 나서서 탄압을 했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조합원이라면 그 안에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에 관계없이 학교 밖으로 내침을 당했다. 그냥 조합원이었던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해직되고 다시 복직될 때까지 4년 반 동안 많은 해직동지들이 생계의 어려움 속에서도 전교조를 지키며 지역마다 환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의 앞자리에 섰다. 부끄럽게도 나는 부모님 곁에서 학원 강사로 생계를 이었다. 그 부끄러움이 지금까지 교육노동운동의 길에서 비켜서지 못하게 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복직 후 나는 완도, 해남, 장흥 등 남해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줄곧 교육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전교조는 처음에는 불법조직이었고 다시 합법노동조합이 되었다가 지금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법외노동조합이다.

그 와중에서도 학교 안에서 민주주의 실현과 학생 인권, 교사 교육권 보호, 참교육실천에 앞장서고 밖으로는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에 앞장서 싸우고 있다. 그러는 동안 스물다섯 살의 학교 안에서 가장 젊었던 새내기 교사가 쉰일곱 살로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중늙은이 교사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전교조는 어렵다. 그간 전교조를 지켜왔던 많은 동지들은 퇴직할 연령이 되었고, 새로 교육동지가 된 젊은이들은 왜 전교조에 가입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그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린다.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부조리와 불평등의 세상에서 신음하지 않게 하는 것은 가르치는 자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내 옆자리의 선생님이 부당한 처우와 갑질에 시달리지 않게 하는 것은 동료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 전교조가 필요합니다. 선생님 전교조에 가입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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