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 바캉스(vacance·영어로는 vacation)는 한적한 곳에 가서 한 달 정도 푹 쉬는 휴가를 일컫는다. 우리에겐 여름바다의 낭만이 물씬 풍기는 뉘앙스로 다가온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빴던 70년대, 산업화의 일선에 선 샐러리맨(봉급생활자)에게 바캉스는 머나먼 이국(異國) 땅에서나 있음직한 동화 속의 판타지(공상)일 뿐이다. 낯설기만 한 이런 외래문화는 그래도 젊은이들에게 낭만과 꿈의 무대로 점차 그 실체를 드러냈다. 여기에 불을 지핀 노래가 있다. 바로 1970년에 발표된 '해변으로 가요'.
'별이 쏟아지는/해변으로 가요/젊음이 넘치는/해변으로 가요/달콤한 사랑을/속삭여줘요/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나는 나는 행복에/묻힐 거예요/불타는 그 입술/처음으로 느꼈네/사랑의 발자국/끝없이 남기며/별이 쏟아지는/해변으로 가요/젊음이 넘치는/해변으로 가요/달콤한 사랑을/속삭여줘요///'
'2기 키보이스'가 부른 이 노래는 암울한 사회상에서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던 대학생들에게 젊음을 발산시키는 창구로써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나중에 일본의 번안곡(飜案曲·노랫말만 바꾼 곡)으로 밝혀지긴 했으나 대중가요 사상 최고의 '여름 노래'라는 명성을 남겼다.
이 노래의 바통을 이어받은 여름 노래가 1975년 선보인 송창식의 '고래사냥'. 가사가 염세주의를 부추긴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금지곡이 되었으나, 이 때문에 오히려 더 사랑을 받았다.
젊은이들의 전유물인 '낭만의 여름'은 이 때부터 차츰 일반인의 눈에도 띄게 된다. 그로부터 4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바캉스는 대부분 국민들에게 한여름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는다. 이젠 전 국민의 70% 이상이 여름휴가를 떠난다. 그것도 '7말8초'(7월말과 8월초)의 고생길을 마다하지 않고 통과의례로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자녀의 방학기간이 한몫을 한다.
그리고 나타난 복병 '코로나19'. 우리 삶에 6개월 넘도록 족쇄를 채웠던 코로나19는 여름휴가마저 '안 가느니만 못하게' 몰아세웠다. 그래서 나온 게 별의별 잡탕식(?) 여름휴가이다.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신조어를 굳이 나열하면 이렇다.
차에서 숙박을 해결하는 '차박', 소풍처럼 하루 만에 가볍게 다녀오는 '캠프닉'(캠핑+피크닉), 호텔로 바캉스를 떠나는 '호캉스', 집에 텐트나 캠핑의자를 설치해 여행기분을 내는 '홈캠핑'이 있다. '몰캉스'(쇼핑몰+바캉스), '백캉스'(백화점+바캉스), 북캉스(책+바캉스), 한캉스(한나절+바캉스), 애니캉스(애니메이션+바캉스), 맛캉스(맛집+바캉스), 뷰캉스(뷰티+바캉스) 등등. 여기에 집이나 도심에서 편안하고 느긋하게 쉬겠다는 스테이케이션(Stay/머물다+Vacation/휴가), 휘겔리케이션(Hygge/편안+Vacation)도 있다. 참 어지러운 여름나기이다.
'죽어도' 여름휴가는 가야겠다고 하더라도 바캉스족에게는 탈 없는 여름을 보내야 하는 대명제가 앞에 놓여 있다. 호시탐탐 노리는 코로나19를 피해 나만의 한적한 곳을 찾아보자. 아니면 '7말8초'의 소나기가 그치기를 기다리자. 우리에겐 지난 5월 황금연휴의 악몽을 학습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여름휴가 하면 연상되는 단어가 예년에 '설렘'이었다면 올해는 '찝찝'이라고 하는데, 차라리 방콕(방에만 처박혀 있음)은 어떠할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