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희(주부)

 
 

비가 많이 왔던 엊그제 소파의 낮은 팔걸이 한쪽을 베고 누워서 '미국 영어 문화 수업'을 읽고 있었다.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작가가, 언어는 문화라는 관점에서 미국과 한국의 문화를 간략하게 비교하여 쓴 책이다. 다음 학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제목만 보고 구입한 책인데 읽는 데도 부담이 없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더워지는가 싶더니 갑갑했다.

마침 다른 쪽 팔걸이를 베고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는 남편에게, "여보, 창문 좀 열까?"라고 말했다. "비 들이치지 않을까? 바람이 불지는 않던데."라고 응답하는 남편의 말에 들이치지는 않을 거라고 하며 내심 남편이 얼른 일어나 창문을 열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남편은 하던 일만 계속 하고 있었다. 눈치 없는 남편의 얄궂은 발바닥에 눈을 흘기고 다시 책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자마자 다음 읽을 대목의 소제목이 '고맥락 문화와 저맥락 문화-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라'였다. 웃음이 터졌다.

절에 가서도 젓국을 얻어먹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고맥락 문화에서 살아내기가 어떤 이에게는 녹록하지 않은 일이다. 눈치라는 단어와 쉽게 연관되는 고맥락 문화란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할 때 직접적으로 오가는 말보다 문맥과 맥락이 상대적으로 더 큰 역할을 하는 사회 환경을 말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와 아랍국가가 이 문화권에 속한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꼭 말로 해야 알아듣느냐는 핀잔에 애꿎은 뒷머리만 긁어대는 이들도 많고, 해석하기 나름인 상황도 많다.

지난 5월 하순에 우리 아파트 월례회의가 있었다. 공시지가 이의신청이 주된 안건이었다. 인근 다른 아파트의 공시지가보다 두 배 이상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주변 아파트의 공시지가와 공시가격을 비교해서 볼 수 있는 피피티(PPT)를 만들고 프레젠테이션 준비도 마쳤다. 그러나 당일 참석한 주민은 전체 입주민의 3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코로나19의 여파라고 위안을 삼고 그 다음날, 하루내 PPT를 이용한 동영상을 만들어 밴드에 올렸다. 공시지가 이의신청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찬반투표를 실시한다는 공지와 함께. 그리고 1층 로비에 찬성과 반대를 표시할 수 있는 문건을 관리실 유리창에 부착했다. 오고가며 동태를 살폈다. 한 가구가 표시를 했고 또 한 가구가….

드디어 마감시간이 도래했고 긴장된 마음으로 내려가서 보니 열 가구가 찬성을 했다. 찬성 10에 반대 0. 과반의 찬성을 얻지 못했으니 공고한 대로 그 안은 부결되었다. 그러나 그날 밤새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나 마음이 복잡했다.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날이 갔고 아파트 밴드에 글을 올릴 기회가 있었는데 그 참에 입주자회의 대표로서 느끼는 심경을 피력했다. '아파트 입주자 회의는 당연히 입주민이 행복할 일을 하려고 하지만 때로 누군가에게는 유난스럽고 시끄럽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눈 감고 귀 막지 마시고 의견을 주셔야 입주자회의가 길을 잃지 않고 입주민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반대에도 찬성에도 표를 하지 않은 반대 0표에 대한 해석은 숙제로 남아 있다.

해남군청사와 마찬가지로 안전진단에서 D등급을 받은 전 승주군청이 보강 공사를 통해서 역사성도 살리면서 순천의 영동 1번지로 탈바꿈하여 생활 문화 예술의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구청사에 철거든 존치든 아무런 의견을 말하지 않고 있는 군민들을 철거에 찬성하는 쪽으로 몰고 가지는 말아야 할 일이다. 우리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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