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질곡의 역사 '4070' 그리고 해남인
4. "내 이름이 광수란걸 중학교 때 알게 됐지"한국전쟁의 눈물… '영화' 같은 사연들
이창섭 기자  |  nonno@h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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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13  01:4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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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싣는 순서 |

① 5·18 40주년,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나
② 5·18 그날의 해남 그리고 해남인
③ 지워져 가는 기억들, 끝나지 않은 상처들
④ 한국전쟁, 그날의 해남, 그리고 해남인
⑤ '4070',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 김광수 씨가 유해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부모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부모님과 이름까지 뺏겼다

- 김광수 씨(경기도 김포)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어느덧 70주년, 한국전쟁은 당시 일곱 살이던 김광수(77) 씨로부터 모든 것을 앗아갔다. 심지어 그의 이름까지도. 

김광수 씨는 한국전쟁으로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70년이 다 됐지만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김 씨의 아버지는 좌익 관리대상이라는 보도연맹원으로 분류돼 전쟁이 터지자 경찰에 의해 1950년 7월 진도 갈매기섬으로 끌려가 무참히 살해당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시신을 찾으러 간다며 동네 주민들과 함께 갈매기섬으로 향했지만 생사도 모른 채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갈매기섬에서 잠복해있던 경찰들이 시신을 찾으러 온 가족들의 배에도 무자비하게 총을 발사해 배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작은아버지 식구들이 집으로 들어와 같이 살게 됐는데 아버지의 논과 밭 등 모든 재산은 사라졌고 자신보다 여섯 살 어린 동생은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삐쩍 말라 숨진 채로 발견된다.

중학교 때는 작은 아버지가 입학금과 수업료를 제대로 내지 않아 두 달만 학교를 다닌 뒤 학교에서 쫓겨나게 됐다. 김 씨는 그 때부터 아예 밖으로 뛰쳐나와 껌팔이와 담배팔이부터 시작해 양곡관리소와 철물점을 지키고 동네 점방, 주류협회, 교육청 기능직 일을 하게 된다.

김광수 씨는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나를 '광석'이라 불렀는데 중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호적등본을 떼보니 거기에 내 이름이 '광수'라고 돼 있어 그때서야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알게 됐다"며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부모님과 동생을 잃고 내 이름도 제대로 모른 채 살게 된 것이다"고 한탄했다.

김 씨는 모든 재산을 뺏기고 논 1000평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해 어렵게 돈을 모으고 다섯 자녀를 두게 됐다. 큰 자녀가 은행에 들어갈 때 형사가 직장으로 찾아와 뇌물을 줘서 돌려보낼 정도로 연좌제는 자녀들에게까지도 한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더 이상 해가 되지 않기 위해 유족회와도 연락을 끊고 살았고 그래서 진실규명 신청이나 배상소송이 있는 지도 모르고 지냈다. 

김 씨는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부 진실규명을 밝히고 갈매기섬에서 유해발굴을 통해 20여구를 발굴했지만 이후 추가 진상조사나 유해발굴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부모님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해라도 고향인 해남에 모실 수 있도록 정부의 후속 조치가 하루 빨리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 김상훈 씨가 연좌제 피해로 목숨을 끊은 오빠 얘기를 들려주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는 연좌제 족쇄로 자살

- 김상훈 씨(서울 서대문구)

서울에서 만난 김상훈(75) 씨. 김 씨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전쟁 피해로 인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밖으로 나가기를 꺼려하는 것은 물론 경찰을 보면 피해 다니고 빨리 걷게 되는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 씨 가족은 계곡면 방춘리에 있는 할머니 집으로 피난을 왔다. 

그러던 10월 어느 날 할머니와 마실을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찰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마을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때리고 잡아가고 마을에 불을 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서울 수복 후 인민군을 도왔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부모님과 큰 오빠, 언니 2명 등 가족 5명이 잡혀가 그 뒤로 생사확인이 안 되고 있다. 

당시 김 씨는 나이가 어려 잡혀가지 않았고 둘째 오빠는 목포에 있어 화를 면했다.

김 씨는 잠시 피해있으라는 마을 사람들 말에 따라 물도 없이 주먹밥 두덩이만 쥐고 산속 굴속에서 며칠을 홀로 버텨야 했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목포에서 돌아온 작은 오빠마저 '빨갱이'라며 경찰에 끌려갔다. 할머니 또한 화병으로 얼마가지 않아 돌아가셔 김씨는 주위에 돌봐줄 사람 하나 없이 친척집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이후 작은 오빠는 16살밖에 안 된 중학생이었지만 10년이라는 중형을 받고 청소년들만 가두어 두는 형무소에 갔다가 모진 매질과 고문으로 결국 5년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폐결핵으로 숨졌다는 말을 듣게 됐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작은 오빠는 16년이 지난 뒤 살아 돌아왔고 그 때서야 경찰을 피해 도망가 가명으로 숨어 살았고 병 치료를 하며 화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지만 기쁨도 잠시, 경찰에 뒤늦게 자수한 오빠는 공소시효가 지나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고 경찰도 그렇게 약속했지만 매일 경찰서에 불려가 16년 동안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했는지 반복되는 취조를 받아야 했다. 오빠는 결국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경찰서 가기를 죽기 보다 싫어하다 결국 두 달만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김상훈 씨는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데도 오히려 보호는커녕 연좌제 굴레와 족쇄로 한 젊은이를 사지로 내몰고 갖은 고문과 매질도 모자라 정신까지 병들게 하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며 "우리 가족과 오빠를 살려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김 씨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이 어느 곳에 계신지, 하루 빨리 유해라도 찾아서 모시고 명예회복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진상조사 외에 배상·예우까지 이뤄져야"

   
 

- 조영선 변호사(전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

지난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에 대해 다시 규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올해 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꾸려져 최대 4년 동안 활동에 들어간다. 

2006~2010년까지 1기 활동이 단순히 조사에만 그쳤다면 이번에는 진상규명과 함께 배상, 예우까지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관련법 개정이나 제정 같은 후속조치가 필요하다. 

특히 1기 때 진상이 규명됐지만 지난 2011년 울산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해 진화위 결정문을 받은 뒤 3년 안에 소송을 하지 않으면 시효가 소멸된다는 대법원 판례 때문에 상당수가 보상받을 길이 봉쇄돼 버렸다. 따라서 소멸시효나 소송과 상관없이 진상규명이 이뤄진 사건에 대해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일괄 배상을 하는 국가 배상법이 필요하다. 

또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해서도 5·18유공자법 같은 예우법이 국가차원에서 마련되고 과거사재단 등을 설립해 위령사업이나 추모사업이 진행돼야 한다. 이 밖에 현재 방치되고 있는 유해발굴도 국방부 유해발굴단과 업무 협조를 통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유해발굴을 재개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 이뤄져야만 완벽하게 과거사가 정리되는 것이요, 억울하게 숨진 원혼들을 진심으로 달래는 길이 될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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