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문명이 발전을 거듭해올 수 있는 바탕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인간의 지능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창조 능력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세와 확인되지 않는 저 세상을 연결시켜주는 정신적인 매개, 즉 종교도 포함된다.

종교(宗敎)는 으뜸가는 가르침이란 뜻이다. 이 말은 불교에서 생겨났다. 불교 경전은 인도의 고전어인 산스크리트어(범어·梵語)로 기록되어 지금 우리말에도 살아있다. 비구니, 우담바라(불교에서 3000년 만에 한 번 핀다는 상상의 꽃), 아수라, 사리, 가사(옷), 아바타(분신), 요가(결합), 정글(경작되지 않은 땅) 등이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700년이 흘렀다. 그 세월을 지나면서 '이판사판', '야단법석' 등을 만들어낸 불교문화는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배어있다. 그런데 한국 불교에 대해 오랫동안 '나라를 지키는' 호국(護國)과 '복을 비는' 기복(祈福)의 특징이 강하다는 비판적 시각이 뿌리 내리고 있다. '짐이 곧 국가'라는 왕조시대에서 호국과 기복이 왕과 왕실을 위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호국의 과정에서 불교의 핵심 계율인 '불살생'(不殺生·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음)을 범했다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런 비판에 대해 정병삼(66)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명예교수는 올해 초 출간한 '한국불교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호국은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에 나오는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잘 다스린다는 원론적 의미이다. 한국은 워낙 외침이 많았으니 임진왜란 때 승병처럼 불교의 중요한 부분이긴 하다. 하지만 '호국 불교'는 일제강점기부터 쓰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국가주의와 맞물린 일본 불교가 한국에 침투하면서 '호국론'이 소개됐다. 해방 이후 정권과의 협력 관계에서 그러한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 책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 불교의 흐름과 진수를 꿰뚫는, '30여년 만에 나온' 불교통사로 평가받는다. 저자는 한국 불교에서 호국만 떠올린 건 편견이며, 가장 큰 특징은 조화와 융합이라고 말한다. '기복불교설'도 개인과 사회의 안녕을 비는 종교의 기본 성격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중심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법명 휴정)가 있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교지를 받아 1500여명의 승병(僧兵)을 이끌고 평양 탈환작전에 나서 큰 공을 세웠다.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의 별호를 얻고 85세에 입적한 뒤 가사(袈裟·장삼 위에 걸쳐 입는 법의)와 발우(拔羽·식기), 의발(衣鉢·의복)이 대흥사에 봉안됐다. 서산대사의 유언에 따라 '만세동안 훼손되지 않을 땅' 두륜산 대흥사에 모셔진 것이다.

대흥사가 오늘날 명찰(名刹)로 성장한 배경에는 이처럼 서산대사가 있다. 조계종 25개 교구에는 전남에서 대흥사(22교구)를 비롯 백양사(18교구), 화엄사(19교구), 송광사(21교구) 등 4곳이 있다.

지난달 27일 대흥사 표충사 일원에서는 서산대사 탄신 500년을 맞아 호국대성사(護國大聖師) 서산대제가 봉행됐다. 서산대제는 위기에 처한 나라와 도탄에 빠진 중생(백성)을 구하기 위한 서산대사의 정신을 기리는 행사이다.

호국불교를 지배계층 특권 옹호와 불살생계를 범했다는 쇠창살에 가두어버린 일부의 비판적 시각이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은 아닌지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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