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싣는 순서 |

① 5·18 40주년,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나
② 5·18 그날의 해남 그리고 해남인
③ 지워져 가는 기억들, 끝나지 않은 상처들
④ 한국전쟁, 그날의 해남, 그리고 해남인
⑤ '4070',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 해남군유족회 회원들이 지난 9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학살이 이뤄진 마산면 붉은데기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해남군유족회 회원들이 지난 9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학살이 이뤄진 마산면 붉은데기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2500명 이상 주장… 정부는 159명만 인정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 국가공권력에 의해 아무 죄 없는 민간인이 무참히 살해당했다. 전국적으로 114만명, 전남 22만명, 해남 2500~3000명으로 추정된다.

경찰과 우익단체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후퇴과정이나 서울 수복이 이뤄진 뒤 수많은 사람들을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누명을 씌워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해남에서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부역 혐의와 보도연맹 사건, 나주부대 경찰 학살 사건 등 3가지로 분류된다.

부역자의 경우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이 이뤄진 뒤 경찰과 우익청년단이 인민군을 도운 혐의를 씌워 수많은 사람을 재판도 없이 산과 들로 끌고 가 무참히 학살을 자행한 사건을 말한다.

보도연맹사건은 경찰이 1950년 7월 부산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좌익 관리대상으로 몰아 수감 중이던 해남지역 보도 연맹원들을 15일과 16일 사이 배로 이송해 진도에 있는 무인도인 갈매기섬에서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다.

나주부대 학살은 1950년 7월 23일쯤 부산으로 도망가던 나주 경찰부대가 해남읍 해리와 마산면 상등리 일대에서 인민군복으로 위장해 마을을 돌면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민군 만세를 외쳤던 주민들을 대검이나 총으로 무참히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유족들은 해남에서만 2500~3000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했지만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는 해남에서 159명만이 살해됐다고 인정했다.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시설 설치와 인권교육도 권고했지만 정부와 지자체의 무관심으로 당시 학살이 자행됐던 역사적 현장은 표지석 하나 없이 방치돼 있고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인권교육과 역사교육은 전무한 실정이다.

유족들은 빨갱이라는 손가락질과 연좌제 고통을 벗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고 자식들에게 해가 될까봐 가족사에 대해 쉬쉬해야 했으며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서 아픔을 안고 살아야 했다. 알고도 진화위에 조사 신청을 하지 않거나 모르고 안한 경우도 많았으며 진화위 결정문을 받은 유족들도 일부만 민사소송을 제기해 보상을 받았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해남군유족회 이창준 회장은 "국가가 국가폭력을 인정했지만 진화위 결정문 어디에도 보상이나 소송과 관련한 말은 없다. 오히려 대법원은 지난 2011년 울산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해 진화위 결정문을 받은 뒤 3년 안에 소송을 해야 한다고 판결해 이 전에 진화위 결정문을 받아만 놓고 있었던 유족들의 경우 보상받을 길마저 없게 만들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올해 다시 과거사정리법이 제정돼 추가로 진상조사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보상이나 소멸시효 부분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숙제로 남아있다.

- 아물지 않은 상처, 지워져 가는 흔적

이창준 회장(73)은 한국전쟁 이후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으로 가족 전체가 산산조각나 버렸다. 작은아버지, 고숙이 좌익으로 내몰려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는 이를 항의하러 지서에 갔다 붙잡혀 역시 좌익으로 내몰려 희생당했다.

할아버지는 충격으로 술만 마시다 2년 뒤에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작은어머니는 3년 뒤 중풍으로 돌아가셨다.

가세는 기울었고 빨갱이 집안이라며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배우고 싶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한 게 다였다.

이창준 회장은 "제대 후에 한국도로공사 임시직으로 들어갔는데 같이 들어간 임시직들은 다 정규직이 됐지만 나만 되지 않아 물어보니 신원에 문제가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연좌제는 내 인생의 꼬리표처럼 계속 따라다녔고 결국 먹고 살 길이 없어 택시기사를 시작한 게 40여년이 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 지난 9일 해남군유족회 이창준 회장(왼쪽)이 해남군을 방문해 민간인 집단학살지에 안내판을 설치해 줄 것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전달했다.
▲ 지난 9일 해남군유족회 이창준 회장(왼쪽)이 해남군을 방문해 민간인 집단학살지에 안내판을 설치해 줄 것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전달했다.

- 역사적 현장에 안내판이라도 설치되길

지난 9일 이창준 회장을 비롯해 오강부(78), 박익남(74), 이현희(69) 씨 등 유족회 회원 4명이 해남을 찾았다. 한국전쟁 70주년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아픈 기억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오강부 씨와 박익남 씨는 부역혐의로 아버지를 잃었고 이현희 씨는 시아버지를 잃었다. 해남에는 진화위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 학살사건 현장이 계곡면 방춘리와 마산면 붉은데기, 화산면 나붓재, 산이면 뻔지 등 18군데에 달한다. 그러나 이 곳에는 역사적 현장을 알리는 표지판이나 안내판 하나 없다.

그 사이 산이었고 나무가 무성했던 이들 장소는 논이나 밭으로 개간됐고 부근에 도로와 민가가 들어서기도 했으며 일부는 과일나무 밭이 들어섰다.

오강부 씨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으로 구성된 토벌대가 각 지역을 돌며 인간사냥 하듯이 사람들을 살해했고 계곡 방춘마을에서는 마을 전체에 불을 지르기도 했으며 부역혐의로 각 지서 등에 잡혀있던 사람들을 밤에 수십명씩 이들 장소로 데려가 대검으로 찌르는 등 학살을 자행하고 시신은 인근 산에 방치해 버렸다"고 말했다.

박익남·이현희 씨는 "연좌제를 피해 숨어 살 듯 하면서 유족들은 눈물로 70년을 보내왔고 이제 대부분 70~80대가 되었지만 아직도 아버지,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며 "관련법을 개정하거나 별도의 특별법을 만들어 정확한 진상조사와 후속조치가 하루빨리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유족들은 이날 해남군을 방문해 해남에 있는 민간인 집단학살지에 대해 당시 상황을 알리고 역사적 현장을 기리는 표지판이나 안내판을 세워줄 것을 요청했다.

유족들은 "사유재산으로 바뀐 경우 어려운 점이 있겠지만 세종시나 전북 임실처럼 도로변이나 인근 공공기관에 표지판을 설치해 한맺힌 현장을 계속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역사적 현장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고 앞으로 역사교육의 장이 됐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 세종시 연기군에는 민간인 집단학살지임을 알리고 희생자를 기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 세종시 연기군에는 민간인 집단학살지임을 알리고 희생자를 기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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