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률(교사, 시인)

 
 

상의 사전상 의미는 '잘한 일이나 훌륭한 일을 칭찬하기 위하여 주는 증서나 물건 또는 돈'이라고 되어 있다. 뭔가 좀 부족한 풀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필자는 경쟁과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듯한 이 풀이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고 일정한 성과를 낸 사람에게 칭찬하는 일이야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양태는 우리 사회의 각박함을 생산하고 확대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그들만의 주고받기에 조롱감이 되기도 하는 게 한국의 현재이기도 하다. 작금의 사태를 보자. 조국, 윤미향으로 대표되는 시민운동가들의 대가성 챙기기는 한국사회의 민낯을 들추는 쑥스러운 현상이다. 그들은 오랜 기간 사회의 소금이 되기 위해 많은 활동을 펼쳤다. 그 활동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고 고맙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그에 대한 대가 챙기기나 상을 수여받는 모습, 심지어는 셀프 상장까지 나오는 상황을 목도한다면 이건 뭔가 '거시기'하다. 그들이 받는 상이나 대가가 대단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약 올라서 그러는 건 더더욱 아니다.

상에 대한 사전적 의미에서 아쉬움 하나를 들자면, '상은 자격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응원이다'라는 것이다. 격려와 장려의 입장이 없는 상은 왠지 노획물 같은 느낌이 든다. 극단적인 예로 '평화를 위한 군대에게 노획물이 많다면' 좀 그렇지 않겠는가? 비윤리 집단일수록 끼리끼리 챙겨주는 상이 많다. 그들에게 그것은 스펙이고, 또 다른 노획의 수단이 된다. 부패한 기득권이나 부패한 권력집단에서 너무도 흔한 일이다. 아주 작은 일을 뻥튀기하는 것은 그들에겐 도덕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보기에 상당히 추하다. 한국의 가진 자들 중에는 이런 추한 자들이 매우 많다.

그럼 상은 누가 받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학교 이야기 하나 올린다. '장학금은 누가 받아야 하는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학교는 응당 성과주의에 입각해 성적 우수자나 특별한 경우 한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는 버릇을 키워왔다. 우리의 토론은 진지했으며, 교육 전반의 문제를 아우른 후 '장학'이란 용어에 충실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쉽게 말해 '학업을 장려'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하자는 것이었다. '장려의 대상이 누구여야 하는가?'는 쉽게 결론이 났다. 학업 장려가 필요한 사람이 그 사람인 것이다. 성적 우수자나 성과를 많이 낸 사람이 아니라 학업을 위해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나 성과보다는 그 일에 열정을 쏟을 가능성을 보고 장학금을 지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이다. 이 당연함이 의심받는 사회에서 우리는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참 쓸데없이 말이다.

이제, 상은 누가 받아야 하는가? 보다 선명해졌다. 칭찬하기 위함과 격려나 장려하기 위함으로 수여해야 한다. 잘 하는 사람에게도 수여할 필요가 있겠으나 그에 우선하여 잘 할 수 있도록 격려나 장려가 필요한 사람이 우선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약에 그 국회의원 자리에 윤미향이란 사람이 아닌, 오랫동안 그 실무를 맡아 열정을 쏟아왔던 청년 일꾼에게 그 자리가 갔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그 자리가 참 아름답지 않았을까? 그 열정과 아름다움이 국회를 장식했다면 국회 모습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필자는 확신한다. 학교에서 학업의 의미를 잃었거나 학교생활을 피하고 싶은 학생들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역할로 상이나 장학금이 수여됐다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행복한 학교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최소한 경쟁이 미화되고 서열이 법칙화 되는 작금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라도 변화를 시작하자. 작지만 큰 '왜 그래야 하지?' 하는 그대 안의 혁명을 시작하자. 그 작은 변화의 하나로 승자독식의 상 문화를 바꾸자. 잘난 사람이 상을 휩쓸고, 잘난 사람이 점점 힘을 쓰는 사회는 그 자체가 폭력이고 부패이다. 우리 독차지하지 말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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