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보기 어려운 세상에, 신문 이상으로 고마운 것은 이 삐라가 아닙니까. 신문에는 통 비치지도 않는 소리가 여기에는 쑥쑥 나오지 않습니까.' 해방 직후인 1946년 출간된 박노갑의 소설 '역사'에 나오는 구절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워듣기가 좀체 어려웠던 시대에는 삐라가 좀 더 고급스런(?) 정보에 목마른 국민들에게 시원한 소식을 알려주는 고마운 소식통이었다. 외래어인 삐라의 어원(語源)은 불분명하다. 전단지나 고지서를 뜻하는 영어 'Bill'(빌)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이 뿌린 '빌'을 일본군이 '비라'로 읽고, 이를 우리가 경음화해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런 삐라가 한국전쟁을 거치고 남북이 서로 비방하는 주된 수단이 되면서 불온(不穩)의 의미가 강해졌다. 그래서 삐라는 전단(傳單)이란 말의 느낌과 전혀 다르다.

삐라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로 거슬러 올라가나, 1920년대 일본군의 선무반(宣撫班)이 항일무장단체를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뿌렸다. 그러던 게 한국전쟁(1950~1953년)에서 절정에 달했다. 당시 삐라 내용을 살펴본다.

'중공군이 좋은 무기는 모두 차지하고, 못쓸 무기만 인민군에 준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항복하면 후한 음식과 치료를, 대항하면 폭격과 포격을'(유엔군)

'미국 놈이 조선민족의 원쑤(원수)다. 동족끼리 피를 흘리지 말자' '백성은 곤궁에 빠져 있는데 리승만 역도들은 환락에 취하고 있다'(북한군)

한국전쟁은 '삐라 전쟁'으로 불릴 정도였다. 당시 제공권을 완전 장악한 유엔군은 3년여에 걸친 전쟁에서 25억~30억장(장당 크기 17×10㎝), 북한군은 3억장 정도의 삐라를 살포한 것으로 추산된다. 유엔군이 뿌린 삐라(30억장 기준)를 펼치면 51만㎢로 한반도(22만㎢)를 두 번 이상 뒤덮을 만큼 엄청났다.

전쟁은 끝났지만 남북 대치상태가 계속되면서 삐라도 폭격기나 대포에서 기구나 풍선으로 갈아타고 생명을 이어갔다.

1960~1990년대 전방에서 군대생활을 한 국민들은 유치하고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삐라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다. 남한은 '3대째 권력세습 획책. 애비 아들에 이어 다음은 손자 놈 차례?'(세습 조롱), '자유가 있는 곳에서 멋진 미인을 만나보세요'(귀순 종용)나 경제 발전상의 내용을 날려 보냈다. 북한은 주로 우상화나 북한 체제 선전, 귀순 종용, 전두환 만행, '양키는 아메리카로' 등의 내용을 남한으로 날렸다.

삐라는 반세기 동안 남북이 서로 비방하거나 체제 선전 도구로 이용되다가 2000년대 들어 상호 비방을 중지하기로 하면서 정부 주도의 살포는 공식적으로 중단됐다. 이때까지 초등학교에서 삐라를 주워온 학생들에게 주던 학용품 선물도 없어졌다. 이후 대북 삐라는 탈북민단체 주도로 명맥을 이어갔다.

'냉전시대 유물'인 삐라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탈북민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최근 삐라를 북한으로 날려 보냈다고 주장했다. 북한도 1200만장을 뿌리겠다고 경고하다가 주춤한 모양새다.

어제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0년이 되는 날이다. 지금 세계는 초연결 사회로 묶어지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앞서나간다. 의미나 효과도 전혀 없는 구시대 유물인 삐라가 요즘 시대에 과연 가당치나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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