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섭(해남신문 창간추진위원장)

 
 

해남신문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30여 년 전, 김창섭(83) 창간추진위원장은 1년간 해남신문 출범을 위한 준비작업을 진두지휘했으며, 창간 이후에는 초대 발행인으로서 올곧은 언론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 위원장은 당시 해남YMCA 이사장으로서 해남의 공동체 사회 조성, 건강한 사회 만들기, 지방화 시대 등에 대비한 지역 언론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절감했다. 김 위원장을 만나 해남신문의 출범 과정과 창간 정신, 언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해 물었다.

 

초기 월급 밀려 급전으로 해결
재정 어려움에 한때 폐간 검토
독자가 뭘 원하는지에 촉각을

지역신문 사상 최대 규모 군민 주식으로 출발
해남YMCA 주축 창간 작업 

 
 

- 벌써 30여 년 전인데, 창간 당시의 시대 상황은.

△창간 준비작업을 하던 1989년 당시에는 지역 소외가 뿌리 깊었다. 이는 곧 찾아올 지방화 시대의 필연성으로 귀결된다. 지방화 시대가 화두였던 것이다. 진정한 지방화는 지역 문제를 스스로 찾아내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당시 해남에서는 농민들의 수세(水稅) 거부와 양담배 추방 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이런 사회 상황에서 언론 자유화 물결을 타고 전국에서 신문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대부분 신생 언론은 자본을 앞세운 기업인이나 소수에 의해 주도되면서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해남에서만큼은 지역 소식을 충실히 전달하고 지역 발전의 주춧돌이 되는 '다수가 참여하는 신문'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 창간추진위원장을 맡게 된 배경과 모델로 삼은 언론사가 있다면.

△한겨레신문 창간을 주도한 송건호(2001년 작고) 사장이 "지방시대가 다가오는데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많이 했다. 자본에 기대지 않은 지방신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처럼 우리도 군민주를 모집해 신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해남YMCA 이사장이었고, YMCA의 청년모임인 한솥클럽이 창간준비의 주체였기 때문에 추진위원장을 맡게 됐다. 그야말로 정의감만 앞세워 창간작업에 나섰다. 당시 YMCA 주도로 먼저 창간한 충남 홍성신문과 경남 거창의 아림신문도 지켜봤다. 그리고 해남과 이들 지역의 상황을 비교, 분석해 5~6명으로 창간 실무준비를 위한 초기 진용을 꾸렸다. YMCA의 신망 있는 인맥이 많은 도움이 됐다. 한솥클럽이나 농어민회 등 신망 있는 분들과 연결된 인간관계 고리가 자신감을 갖도록 했다. 당시 민인기(현 해남신문 대표이사) YMCA 총무, 이광교·노광 장로, 박상일·김갑술·천임식 씨 등 많은 분들이 시간과 자비를 쓰면서 참여했다.

- 창간 준비과정에 어려움도 많았을텐데.

△신문 경험도, 재정도 모두 없는 사실상 무(無)에서 시작했다. 준비 과정의 어려움은 말도 못할 정도로 많았다. 30여 명의 창간추진위원을 구성하고 YMCA 건물 1층 사무실에 모여 의견을 나누고 숱한 고민을 했다. 창간을 알리는 첫 소식지가 1989년 11월 20일자로 나왔다. 이듬해 4월 창간을 목표로 했는데 여의치 않아 두 달 정도 늦어진 6월에야 창간호를 냈다. 이 과정까지 모두 다섯 차례의 소식지를 내보냈다. 창간추진위원들은 소식지를 발행한 6개월 여동안 매일 오전 7시에 회의를 갖고 준비작업을 점검하고 계획을 세웠다. 아침 식전에 짜장면을 먹어가며 열정적으로 일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설립 자본금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로 뛰었다. 일단 자본금을 5000만원으로 정하고, 군민주의 특성을 살려 1인당 최고 5%의 범위인 5만~250만원의 발기인 출연금을 모집했다. 또한 주당 5000원의 액면가로 주주도 모집했고, 발기인의 출연금은 나중에 주식으로 전환시켰다. 참여하신 분들은 되돌려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5500만원 이상을 선뜻 출연했다. 이런 눈물겨운 노력으로 창간 발기인으로 473명이 참여했다. 군민은 물론 향우들도 한마음으로 동참했다. 지역신문 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일부에서는 냉소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올바른 언론 출범을 향한 군민들의 갈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반증하는 결과물이었다. 지금도 당시를 회고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 창간 전후로 에피소드도 있었을텐데.

△재정적인 뒷받침이 부족해 경영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7~8명에 이르는 직원들의 월급을 1~2개월씩 지급하지 못하기도 했다. 자주 가는 막걸리 집에서 돈을 빌려 밀린 월급을 해결했다. 제때 월급이 나가지 않으면 직원 통솔에 문제가 발생했다. 비유하자면, 손에 든 계란은 꽉 쥐어도 깨지고, 놔두어도 땅으로 떨어져 깨진다. 어떻게 할지 막막할 때가 많았다.

- 해남신문의 창간 정신을 말씀해주신다면.

△사시(社是)에 창간 정신이 녹아있다. '지역민이 함께 하여, 주인으로 대접 받는, 민주언론 해남신문'이 추구하는 창간 정신이다. 창간호를 통해 '군민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입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한 마디로 한다면 해남신문의 주인은 곧 군민이라는 것이다. 해남신문은 군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지역사회 여론을 모으고, 지역발전에 앞장서며 공동체 조성과 건강한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한다. 또한 지방화 시대에 진정한 지방자치를 실현하고, 애향심 고취와 생활문화 향상으로 행복한 해남을 만들어 가는데 앞장서야 한다.

- 창간 이후 위기도 있었는데.

△90년대 초 지역신문은 정치 기사를 보도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정간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특히 경영상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한때 폐간도 고려했다. 조직원 스스로 재출발을 다짐하고 위기를 넘겼다.

- 초대 발행인이자 독자로서 해남신문에 바라는 게 있다면.

△해남신문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다. 창간 당시와 비교하면 언론 시장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이런 기사를 많이 보도해야 한다. 다만 경영적인 측면에서 다소 부족한 여건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신문사 구성원들도 독자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항상 갖고, 독자를 위한 신문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로 뭉치는 공동체 의식을 되찾아야 한다. 비록 적은 숫자일지라도 똘똘 뭉치면 경영의 여건도 배가 되고 독자에게 보답하는 길이 된다. 조직원들이 친목을 도모해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앞으로 취재 대상도 해남 뿐 아니라 전국, 나아가 해외로 넓혀 해남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해남신문이 있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살아온 과정과 건강은 어떠하신지.

△삼산면 원진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 때 삼산초등에 입학한 후 해남중, 목포공고를 졸업했다. 대학 진학은 못하고 해양대 해기사 과정을 수료한 뒤 해기사 면허자격을 취득했다. 이를 통해 1968년부터 4년간 외항선 기관사로 배를 탔다. 이를 그만 둔 뒤 해남에서 트랙터, 이앙기, 경운기 등을 취급하는 농기계대리점을 10여 년간 운영했다. 당시 돈도 많이 벌었다. 신문사와 연을 맺기 이전에는 YMCA에서 사회운동을 했다. 80살이 넘어서자 세월 앞에 장사 없다란 말이 실감난다.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 소주도 한 병은 거뜬히 마시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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