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욱(재경해남군향우회장)

 
 

▲해남 화산 출생(1957년)
▲한양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 서초구의회 5대 의원 
▲방배동 우정갈비 운영
▲재경해남군향우회 운영위원회 부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현 재경해남군향우회장(화산면 향우회장 겸임)

 

이경욱(63) 제20대 재경해남군향우회장은 '서초의 돈키호테'로 통한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무모한 도전이라는 주위의 시선에도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며 어디서나 돈키호테를 자처한다. 때론 좌절의 쓴 맛이 그를 휘감아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그 길로 직진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취감도 맛보았다. 그의 인생은 어쩌면 들녘의 잡초와 같고, 인동초를 닮기도 했다. 고향을 떠난 후 마흔 성상(星霜)을 서초에서 외곬으로 터전을 닦았다. 자생력은 그를 지켜내는 힘의 원천이다. 지난달 22일, 서울 방배동에 위치한 중소기업중앙회 산하 서초구 소기업소상공인회 회장실인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3시간 이상 이어진 인터뷰 내내 그는 할 말이 참 많은 듯 했다. 그 바탕에는 파란만장한 삶이 자리했다.

 

작년 9월 읍면 회장단서 추대 '활성화 중책'
향우 자녀도 고향 자부심 갖는 전시관 필요
'서초의 돈키호테'로 소신 갖고 진로 개척
좌우명은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에 달렸다"

 

- 언제 상경했으며, 이유는.

△화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에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1년 후 진학을 시켜주신다고 했으나, 그 사이 어린 나이에 친구들과 사고를 쳤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닌데, 아무튼 힘든 시기였다. 마침 어머니와 누나가 상경해 식당을 했는데, 15살에 서울로 올라왔다. 종로에 위치한 국제TV학원 2기로 기술을 배워 전기회사, 여의도 KBS 본관 등에서 기술자로 일했다.

- 서울에서 주로 무슨 일을 했나.

△19살 때부터 식당과 맥주홀을 했다. 그 나이에 서초동에서 최연소 통장을 하기도 했다. 내 인생에 큰 사건이 터졌다. 23살 되던 1979년, 오토바이 사고로 10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다. 석 달간 병원신세를 졌는데 병원비가 1000만원 넘게 나왔다. 당시 25평형 연립주택 한 채 거래가가 300만원 정도였다. 집 3채 이상이 병원비로 날아갔다. 식당 2~3개를 운영 중이던 누나의 도움이 컸다. 3년 정도 후 술집도 처분하고 방배동에서 식당을 개업했다. 정말 눈물 나게 일했다. 그러면서도 바르게살기운동이나 새마을운동 등 사회활동에도 눈이 떴다.

- 고된 삶이 고향을 생각하지 못하게 했을 텐데, 고향을 되돌아보게 된 계기가 있다면.

△서초에서 마당발로 살았다. 근데 은행 보증을 서준 사람이 부도나는 바람에 아파트와 단독주택 등 전 재산을 몽땅 날릴 위기에 처했다. 이젠 완전 거지가 됐다고 자포자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은행에서 고향사람이라고 자신을 밝힌 분한테 전화가 왔다. 전혀 알지도 못한 고향 분이었는데, 수습을 어떻게 해야 피해를 최소화하는지 방법을 알려줬다. 은행 빚 보증을 수습하는 데 1년이 걸렸다. 고향 사람 덕분에 다행히 망하지는 않았다. 40살 정도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때 일로 고향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하게 됐다.

- 만학도로 알려져 있는데 언제부터 공부를 다시 하게 됐나.

△마음 한 켠에는 배움에 대한 갈증이 항상 있었다. 그러던 중, 40대에 식당을 하게 되면서 중학교 과정(고입 검정고시)을 사실상 독학으로 마쳤다. 그리고 야간인 신동신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 경영학과(학점제)에서 4년간 늦깎이 공부를 해 57살 되던 2014년 2월 졸업했다. 호적 나이가 실제보다 1년 늦게 실린 것을 감안하면 58살의 나이에 학사모를 쓰게 된 셈이다. 4년 후인 2018년에는 한남대 경영·국방대학원 MBA 석사과정에 입학하기도 했다.

- 한 때 정치인으로 변신했는데.

△20대 초반 오토바이 사고가 제2의 인생을 살도록 한 계기가 됐다. 그 사고 이후 봉사활동에 눈을 뜨기 시작해 사회활동을 많이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구의원에 대한 욕심이 생겨났다. 서초구의원 2번과 서울시의원 1번 도전했다. 결과는 한 번 당선되고 두 번 낙선했다. 2006년 치러진 제5대 서초구의원 선거(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열린우리당(나중에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8년 후인 제6회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시의원 후보로 출마해 46.2%의 득표율로 새누리당 여성후보(52.4%)에게 졌다. 출마한 세 번 모두 민주당 계열 후보로 나섰다. 서초구는 사실상 보수당의 텃밭이다. 구의원 시절에도 15명의 의원 가운데 비례대표 2명을 제외하면 11명이 한나라당 소속 구의원이었다. 비주류이기도 했으나 워낙 못 배웠기 때문에 몸으로 때운다는 자세로 일했다. 우범지대로 전락한 놀이터 옆에 주민들 돈으로 파출소를 지었는가 하면, 놀이터 펜스 철거와 화단 조성, 열린문화센터(사실상 준구청사) 건립 등 현안을 밀어붙였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차상위 계층에 대해 구청이 지원하는 조례를 대표 발의했다. 소수당 의원으로서 쉽지만은 않은 의정활동이었으나,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동료 의원들을 설득했다. 나름 성과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 해남향우회 활동이 다소 주춤하다는 말이 있는데.

△지난해 12월 22일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되는 향우' 슬로건을 내걸고 임시총회 겸 송년회를 가졌다. 김봉호 전 국회부의장, 당시 윤영일 국회의원, 박광온 국회의원, 명현관 해남군수, 이순이 해남군의회 의장 등을 모시고 600여 명의 향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향우회 활동이 다소 미흡하다는 지적에 비상대책회의도 가졌다. 14개 읍면 회장단 협의체에서 지난해 9월 향우회장으로 추대됐다. 해남향우회 활성화라는 중책이 주어졌다. 향우회 활성화는 향우간 교류의 장을 통해 끈끈한 정을 나누고, 뿌리인 해남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서 해남이 발전하는데 무엇을 해야 하는 지 고민하는 것이다. 코로나19의 한파가 향우회에도 밀어닥쳤다. 5월에 열리는 행사를 갖지 못했지만, 코로나가 종식되면 10월께 야외 단합대회도 계획하고 있다.

- 향우회 차원에서 해남 방문 계획은.

△당초 2020년 해남 방문의 해를 맞아 4월 중 100여 명의 향우들이 해남을 찾을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무산됐다. 명량축제가 9월에 예정대로 열린다면 그 때 방문계획을 갖고 있다. 10월 해남군 주최의 김장 담그기 행사도 기대하고 있다.

- 해남에는 자주 오는지.

△1년에 3~4번은 방문한다. 고향에는 현재 형수가 살고 있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형의 산소가 있다. 해남에 내려가면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특히 오상진 화산농협 조합장은 향우회에 많은 도움을 준다. 내가 구의원 시절에는 1390명에 달하는 구청 직원들이 사용하는 구내식당에 해남쌀을 이용했다. 해남군의회와 서초구의회 자매결연이 맺어져 있다. 해남군청에는 이용범 재무과장이나 이대진 산림녹지과장, 서연 인구정책과장 등도 향우회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화산에서 고구마 가공업의 정범수, 김 농사를 하는 정경식 등도 친구로서 교류가 많다.

-고향에 대해 바라는 게 있다면.

△서울·경기에 사는 해남향우가 현재 해남인구의 5배인 35만여 명에 달한다. 향우들이 해남을 자주 찾을 수 있는 문화관이나 예술관 등을 마련했으면 좋겠다. 타지나 해남에서 활동하는 정치, 체육, 문화 등 분야별로 자랑할 수 있는 인물들을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들 시설에 전시공간인 향우관을 만들면 우리는 물론 자녀나 자녀 친구들이 한 번이라도 더 고향에 가게 될 것이다. 자녀들이 관광 등의 목적으로 해남을 방문하면 아버지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고 자랑거리가 되리라고 본다. 또한 해남과 향우의 발전을 위해 서울에 해남군 홍보관도 필요하다. 이 곳에서 해남의 농수산물을 판매하고 관광지 소개 등 홍보의 장이 되도록 하면 좋겠다. 현재 해남군과 얘기를 하고 있다. 계획서를 만들어 이를 토대로 의견을 나누면 좋겠다.

- 좌우명과 근황을 소개한다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 일체유심조는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불교용어이다.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가 무덤가에서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맛있게 마셨는데 날이 새어 깨어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원효는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고 그 길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바로 일체유심조이다. 지금은 중소기업중앙회 산하인 서초구 소기업소상공인회 회장을 맡아 4년째 봉사하고 있다. 소기업소상공인회는 소기업소상공인의 권익과 지역사회 봉사를 위한 단체이다. 매년 두 차례 리더스 아카데미 교육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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