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희(주부)

 
 

남편의 고향인 송지면 작은 산골 오지 마을에서 십오륙여 년을 살았고 해남읍에서 또 그만큼 살고 있다. 따뜻하고 정겨웠던 산골 오지 마을은 이제 대동회라도 하는 날엔 서너 명의 70대 중후반의 노인들이 10여 명의 80대 중후반의 노인들을 위해서 음식을 장만하여 상을 차리거나, 면소재지 식당에서 짜장면을 주문한다.

반면에 해남읍엔 대단지 아파트촌이 해리와 구교리에 들어서 신도심이 만들어졌다. 유입 인구도 꾸준히 늘고 있지만 구도심과는 무관한 복잡한 상황이다. 신도심은 사람과 음식 냄새가 늦은 시간까지 넘쳐나지만 군청 앞, 매일시장, 5일 시장 주변(원도심 또는 구도심 지역)은 저녁 9시인데도 문을 열어놓은 상가가 많지 않다.

게다가 현재 구교리에는 영유아 보육과 양육 서비스를 포괄적으로 제공할 '땅끝 가족 어울림센터'가, 해리에는 작은 영화관을 포함한 '해남군 청소년 복합문화센터'가 지어지고 있어 더욱 번잡해질 것 같다.

재개발과 재건축을 통해서 골목이 없어지면서 해남읍 곳곳은 갑작스럽게 도시화되었다. 반듯하고 넓어진 도로에 어울리지 않는 헌 집들은 헐려나가고 새 집과 빌딩이 들어섰다.

올해 대학 신입생이 된 우리 막둥이가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 학교에 데려다 주려면 거쳐야했던 골목길은 금목서, 인동초 그리고 이름 모를 나무들이 삐죽 고개를 내민 담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다녀온 서성리에 그런 골목길은 이제 없다. 골목에 녹아있던 삶의 이야기는 대부분 아파트의 높은 담장, 외부인의 출입을 거부하는 차량 차단기와 공동현관, 그리고 굳게 닫힌 현관문 안에 갇혔거나 사라졌다.

낡은 티셔츠를 버리려고 해도 옷에 깃든 추억 때문에 몇 번이나 망설이게 된다는 옛날 드라마 대사가 생각난다. 그 추억이 스토리이고 현대는 스토리를 팔아먹고 사는 세상이다.

100년이 넘었다는 해남동초등학교는 100주년을 알리는 표지판이 없으면 100년의 역사를 느낄 수 없다. 해남읍은 아무리 둘러봐도 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내년 해남군 신청사가 완공되면 현재의 청사도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까 두렵다.

해남 군청사는 현재 해남읍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근대식 건물 중 하나다. 작년 해남 도시재생 대학은 순천으로 견학을 갔다. 도시재생팀장이 100년 이상 된 건물은 어떤 거라도 무조건 보존될 역사적 가치를 갖는다는 말을 했다. 미래의 세대가 올해도 서대문 독립 민주축제를 기획할 수 있는 건 서대문 형무소를 남겼기 때문이다. 해남 군청사가 서대문 형무소와 보존 가치를 비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남의 환경만 놓고 보면 군청사도 그 역사성만으로 보존 또는 존치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해남엔 놀 곳도 없고 할 것도 없다며 해남사람들이 해남을 비워서 주말이면 문을 여는 식당들도 드물다는 볼멘소리를 많이들 한다.

어떤 이는 합계출생률 1위에 걸맞는 환경이 갖춰지지 않았다며 마음 맞는 친구들과 산모들에게 맛있는 미역국을 끓여서 갖다 주는 보람된 일을 하며 노년을 보내고 싶다는 생산적인 말을 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영어 도서관, 시니어 카페, 방음시설 잘 갖춰진 음악실, 무용실, 공유주방, 수다방 등등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결론은 그럴만한 유휴공간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득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책 제목이 생각났다.

현재와 미래를 대표할 신청사와 앞에 수성송이 있는 과거의 구청사, 해남 행정과 정치의 본거지 신청사와 해남인의 생활문화예술의 근거지 문화예술센터와 구청사가 해남읍성을 사이에 두고 병존하는 그림은 그려봄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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