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는 읍교회 여신도들. 왼쪽부터 최해옥, 구경숙, 김문례, 천정이 씨. 구교회 주차장에 당시 우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 위) 해남읍교회 여신도회를 중심으로 부녀자들이 시위대에 전달할 김밥, 계란 등을 준비하고 있다.
▲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는 읍교회 여신도들. 왼쪽부터 최해옥, 구경숙, 김문례, 천정이 씨. 구교회 주차장에 당시 우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 위) 해남읍교회 여신도회를 중심으로 부녀자들이 시위대에 전달할 김밥, 계란 등을 준비하고 있다.

| 싣는 순서 |

① 5·18 40주년,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나
② 5·18 그날의 해남 그리고 해남인
③ 지워져 가는 기억들, 끝나지 않은 상처들
④ 한국전쟁, 그날의 해남, 그리고 해남인
⑤ '4070',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 5·18의 또 다른 상징 해남읍교회

"광주에서 온 시위대가 배고프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밥을 하고 김밥을 싸고 주먹밥을 만들어 가져다 줬고요. 우리 시민들, 학생들 다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예배당에 모여 철야기도를 하곤 했죠."

지금은 60~80대가 된 해남읍교회(담임목사 김영봉) 여신도들은 40년 전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해남에서의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해남읍교회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해남에는 우슬재, 대흥사, 백야리 군부대, 상등리, 해남중, 해남군민광장 등 5·18 역사 현장이 많지만 해남읍교회에는 당시를 기억하고 기리는 표지석 하나 없는 상황이다.

지난 1906년 창립된 해남읍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와 함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독재정권, 4·19와 5·18을 거친 민주화운동 등 근현대사를 해남군민들과 함께 했다. 특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기본 임무와 더불어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고 농민계몽운동과 소외계층을 위해 앞장서며 모임이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정보요원들이 배치돼 사찰을 했다. 민주화 시위 등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경찰력으로 막는 등 탄압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같은 해남읍교회의 영성은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신도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기도 등 공동체 정신으로 이어졌다. 그 앞에는 당시 이준묵 담임목사와 한시석 부목사가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신도회와 청년회, 부녀회 등 신도들이 있었다.

김문례(78) 씨는 "광주에서 시위대가 온다는 소식에 신도들이 나서 당시 5월 21일 아침부터 옛 교회 사택에 있는 부엌 큰 솥에서 밥을 해 마당 평상에서 주먹밥을 만들고 김밥을 싸서 박스에 넣고 리어카로 싣고 가 지금의 군민광장에서 시위대들에게 나눠주고 차에 실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구경숙(61) 씨는 "옛 한국약국 도로에 청년회가 미리 나와서 수건과 음료수, 빵 등을 시위대에 줬는데 시위대 차량에 그 때 내 나이보다 조금 어린 여고생도 많았어요. 그런데 양 갈래로 머리를 따고 체육복을 입은 한 여고생이 트럭에 꽂혀 있는 대형 태극기를 꽉 쥐고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이 아직도 선해요"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신도들의 기도도 이어졌다. 천정이(76) 씨는 "당시 집사 아들이 광주에서 학원에 다녔는데 학원에서 나온 뒤 연락두절이 돼 밤에 신도들이 모여 예배당에서 철야기도를 했는데 밤새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며 울던 모습들이 생각나네요"라고 말했다.

정광훈 전 전농 의장의 부인인 최해옥(82) 씨는 "배고프면 안 되는데, 다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를 지켜주고 이만큼 성장시켜 준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민주화와 정의를 위해 들불처럼 일어난 민초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00년을 넘게 함께 한 해남읍교회와 신도들은 5·18 당시에도, 지금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를 기억하고 기리는 안내판이나 표지석 하나 없는 실정이다.

이제 이를 기억하고 알리는 것은 지금을 사는 우리 해남사람들의 숙제이기도 하다.

 

▲ 해남고 학생들이 학교 선배인 고 정상덕 씨의 비석을 닦고 있다.
▲ 해남고 학생들이 학교 선배인 고 정상덕 씨의 비석을 닦고 있다.

- 상등리 관통상 후유증 사망, 고 정상덕 씨

"조카가 화원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집안 장손이고 해서 내가 해남으로 전학시켜서 우리 집에서 자취하게 하고 해남고를 보낸 것인데 졸업도 못하고 그리 됐지요, 내가 전학만 안 시켰어도…."

정윤국(84) 씨는 5·18만 돌아오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온다. 해남고 3학년에 다니던 조카 정상덕 씨가 당시 5월 23일 상등리에서 향토사단 군인들이 쏜 총에 복부 관통상을 입고 1년 정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후유증으로 결국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정 씨는 당시 22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어머니가 있는 우수영 집에 들렀다가 23일 해남읍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시위대 버스에 올라탔다 변을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남 5·18 관련해 현재 정부와 군에서 공식 인정하고 있는 사망자는 2명으로 모두 나주사람인데 정 씨는 5·18당시 총상을 입고 병원을 전전하다 1년 뒤에 세상과 작별하게 된 것이다.

올해 87세의 나이로 별세한 정 씨의 어머니 김금단 씨는 5·18해남민중항쟁증언록에서 "근디 이것이 도저히 내가 보니깐 살 것 같지 않아. 앞에는 총구멍이 작은데 뒤에는 이렇게(10cm 정도) 크더라니까,옷에가 피투성이 돼갔고 있응께 내가 그냥 기절을 해불고"라고 말했다.

정 씨와 친구사이로 시위대 버스를 함께 탔던 김병용 씨는 "잠복해있던 군인들이 집중사격을 했고 투항할테니 총을 쏘지 말라고 외치고 손을 들고 나가는데도 사격이 이어졌다"며 "공수부대가 아닌 향토사단에 의해 그것도 투항하는 사람을 조준 사격한 것이 상등리 총격 사건이지만 발포책임자나 정확한 사망자 수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정 씨의 어머니 김금단 씨는 살아생전 "보고 싶어도 내가 사진을 보면 가슴이 아픈께. 내가 저 만큼 내놨다가 또 보고 싶으면 사진을 갔다가 앞에다 놔두고 그랬제"라며 먼저 간 아들을 애통해했다.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한지 40주년이 지났지만 그 진상과 명예회복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고 유가족들의 슬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이 내려진 김덕수 씨의 판결문.
▲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이 내려진 김덕수 씨의 판결문.

- 죽은 뒤에야 무죄판결, 고 김덕수 씨

5·18진상규명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난해 3월 숨진 김덕수 씨.

그는 80년 5월(당시 33세) 해남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였고 큰 불상사가 우려되자 시위대들로부터 무기를 회수해 군부대에 반납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남 민주화시위의 주동자로 몰려 7개월 정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해남에서의 민주화시위 과정에서 향토사단의 무차별 사격과 군부대에서 여러 구의 시신을 직접 목격했고 암매장 사실을 전해 들으며 지난 1988년 광주청문회 때 증인으로 출석해 이를 증언하려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김 씨와 함께 청문회에 참석했던 해남 5·18동지회 김병일 회장은 "5·18당시 31사단장이 정웅 씨였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영입해 국회의원이 됐지, 그런데 청문회 때 31사단에 의한 무차별 발포와 암매장 등을 증언하려 하니 당시 평화민주당에서 해남에서 죽은 부분을 빼주라고 협박하고 김 씨는 병원에 있다 나온 환자로 매도하는 등 증언을 못하게 했어"라고 말했다.

김덕수 씨는 지역에서도 김대중 대통령과 평화민주당을 보호해야 한다고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자 이후 고향인 해남을 떠나 수도권에서 생활했다. 큰 상처를 안고 생활하던 김 씨는 지난해 3월 숨졌다. 같은 해 9월 의정부지방법원은 재심을 통해 80년 당시 시위대에 참여하며 소요, 특수강도, 특수절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김 씨에 대해 무죄를 판결했다.

김 씨의 민주화 운동은 헌법의 존엄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로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39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김 씨의 부인 이은주 씨는 "남편이 몇 개월만 더 살았으면 무죄판결을 직접 받을 수 있었을텐데 안타깝다"면서 "살아생전 해남에서 있었던 5·18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는데 뒤늦게 무죄판결을 받은 것처럼 그 때 진실 또한 하루빨리 밝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40년이 지났지만 무차별 발포와 암매장 의혹은 밝혀지지 않은 채 직접 목격자들은 이렇게 하나둘씩 생을 마감하고 있다.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5·18진상규명위원회가 진실규명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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