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상(전 전라남도문화관광재단 사무처장)

 
 

이맘때면 국비, 도비, 군비 등 각종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지원사업의 공모와 선정으로 문화예술관련 부서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광역문화재단, 기초문화재단이 바삐 움직인다. 예술인들도 해당 사업에 대한 공모내용과 선정과정에 온갖 촉각을 곤두세우고 꼼꼼히 따져 본다. 지금이 올 한해 농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문화예술 지원사업에서 약방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용어가 있다. '팔 길이 원칙'이다. 문화예술기관 운영을 언급할 때 거론되는 단골메뉴다. '팔 길이만큼 거리를 둔다'는 뜻으로 정치인이나 행정관료가 예술 활동을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원칙은 1945년 영국에서 처음 고안됐으며 예술 지원 대상을 선정하고 지원하는 예술평의회(Arts Council)를 창설하면서 정치권력으로부터 예술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이 원칙을 채택했다.

이 원칙은 박근혜 정부 당시 차별적으로 정부보조금을 지급하기 위해 작성한 '블랙리스트'사건으로 더욱 더 부각됐다. 재판에 넘겨진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의 재판에서도 등장한다. 당시 법원은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범행은 팔 길이 원칙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블랙리스트'에는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지원 불가' 대상으로 정리해놓은 예술인이 무려 9473명이 올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해서, 야당정치인을 지지했다 해서 명단에 올랐다한다. 권력자들이 사익을 위해서 문예진흥기금을 인질로 문화예술인들을 통제한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축하모드를 이어가지 못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자 정치인들이 '팔 길이 원칙'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봉준호, 송강호 모두 '블랙리스트' 낙인을 받았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수상 이후에는 지난 정권의 반성도 없이 야당마저도 마케팅에 혈안이 됐다. 2018년 5월 도종환 당시 문체부 장관은 "국가가 지원에서 배제한 것은 물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침해함으로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과 국민들 마음에 깊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 정부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고개 숙인 것과 대조적이다.

지난달 20일 '기생충' 아카데미 수상기념 청와대 만찬에서도 문재인대통령이 '팔 길이 원칙'을 꼭 지키겠노라고 봉 감독에게 거듭 약속했다. 그렇다고 이 원칙이 혈세인 보조금을 무조건 퍼 준다는 것은 아니다. 지원은 받되 간섭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화예술인의 자존심을 깎는 지원절차를 없애라는 주장을 하는 문화단체 대표의 언론매체 기고도 봤다. 농어업인에 대한 보조금 사업도 많다. 그렇다면 자존심 강한 문화예술인에게는 그냥 집어주고 농어업인에게는 따지고, 복잡한 절차를 지키라고 해야 하는가. 심지어 보조금을 노리는 '사냥꾼'들도 그럴싸한 기획서를 들고 여러 사업을 기웃거린다. 공모와 선정 과정에서는 문화예술 담당 공무원이 '갑'이지만, 선정되고 나면 수행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을'이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 사업이 성공적으로 완료돼야한다고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을'과 배 째라는 '갑'으로 자리바꿈되는 것이다. 가끔 최소한의 정산절차마저도 귀찮아하는 문화예술인도 있다.

문화예술 지원정책은 행정편의주의인 통제적 방식에 머물러 있는 엄연한 현실을 벗어나는데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원하는 기관과 지원받는 문화예술인이 진정한 파트너십을 갖고 서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있는 문화, 예술이 있는 삶'이란 예술정책을 달성하기 위해 같은 배를 탔다고 볼 수 있다. 시각예술인의 한사람으로서 '팔 길이 원칙'을 위해 관과 민이 서로 노력하는 것만이 쥐락펴락하는 '손바닥 원칙'의 등장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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