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권철(해남윤씨 중앙종친회장)

 
 

사람들이 해남윤씨 가문을, '3개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라는 아름다운 별칭으로 부르는데는 고산 윤선도의 3대조이신 어초은공의 특별한 공덕이 있다.

가난한 백성이 나라에 내야 할 세금 체납 때문에 옥에 갇혔을 때 세금을 대납하고 세 차례나 옥문을 열어 그들을 석방시켜주었다.

또 진도 굴포리에서 계속 유지하고 있는 고산 당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남성리·백동리·신동리 앞바다에 제방을 쌓아 4만여평의 간척지를 조성하였다.

오늘날에도 231세대 450여명의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사실이다.

이런 연유 때문에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에 사는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매년 정월 대보름 날이면 고산의 은혜에 보답하고 공덕을 기리는 당제를 올리고 있다.

금년에도 지난 2월 8일 정월 보름날 해남윤씨 중앙종친회 임원 및 해남, 광주, 진도지역의 종친회원과 마을 주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굴포리 당제 및 '고산선생 추모제'가 성대히 거행되었다.

몇 해 전부터는 진도군청에서 당제의 예산 일부를 지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계 공무원이 직접 참여한다.

그 날도 군청 기획예산실장이 직접 참여하여 굴포리 당제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참석자들에게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일반인들은 고산하면 중, 고등학교 시절에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던 「오우가」, 「어부사시사」, 「산중신곡」 등과 같은 시가의 영향으로 문인으로만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고산은 당대의 재력가로 광주의 희재 박광옥, 보성의 우산 안방준과 더불어 호남의 3대 갑부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해남윤씨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는 노비문서, 후손들이 다툼없이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기록한 「분재기」는 우리나라의 보물로 지정 되어있다.

또 하나 고산의 진면목은 「병진소」에 담겨있는 부정부패에 맞섰던 선비정신이다.

임금의 뜻에 반하면 3족을 멸했던 당시의 엄혹한 시대에 과거에 합격하여 겨우 성균관 유생(학생)에 불과했던 고산은 예조판서 이이첨의 국정농단을 낱낱이 고하는 병진소(1616년 광해군8년 병진년)를 임금께 올렸다.

이 사건으로 8년 동안 유배 생활 중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났고 훗날 제17대 효종임금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나는 이날 해남윤씨 중앙종친회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아헌관이 되어 술잔을 올렸다.

그날 회장이 되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고산 할아버지에 대해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산의 9대손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슴 뿌듯하게 만끽하는 하루였다.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