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옥(시인)

 
 

코로나19 사태에 졸업시즌이 겹쳐 학교측은 소규모의 경우 '마스크 졸업식'을, 조금 큰 학교는 아예 '졸업식을 취소'하는 상황이었다. 그 중에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소식, 서울대 졸업식이다. 서울대는 2월 26일 예정된 졸업식을 취소할 수도 없고 강행하기도 어려워 각 학과와 대학원의 최고 성적자들 66명만 모아서 졸업식을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많은 시민들이 분노했다.

졸업식을 강행하자니 코로나가 확산되면 쏟아질 비난이 두려웠을 테고, 총장의 '쫌보 베짱 때문'에 졸업식도 못한다는 조롱이(후일에 두고두고 안게 될) 두려웠을 거다. 취소도 강행도 곤란할 때 늘 어중간한 타협책이 등장한다. (전염병은 국가적인 문제이므로 당연히 취소해야 했다는 주장은 며칠 사이에 확산된 신천지교회의 확진자 동선이 밝혀지고 난 이후의 일이다) 여하튼 선발자만 골라서 축소된 졸업식을 치르기로 결정한 것 까지는 온전한 지지를 받긴 어려워도 이해받을 수는 있었을 것인데 왜 선발기준을 성적우수자로 한 것인가?

특별한 이력이 있는 사회봉사자,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대학생활을 마치고 졸업의 영광에 다다른 자, 가장 훌륭한 글을 쓴 자, 가장 운동역량이 뛰어난 자, 4년 간 독서량이 가장 많은 자, 지난 재학기간동안 대외적으로 학교를 빛낸 자. 4년간의 성적이 가장 낮았음에도 열심히 노력하여 졸업에 이른 자… 유쾌하고도 의미가 있는 여러 기준들을 제시했다면 어떨까. 웃으면서 박수를 보낼만한 기준을 한껏 끌어모아 보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학교라는 곳에서는 장학금도 성적순, 표창과 기회선발 기준도 성적순, 외국 파견이나 연수 기회자의 선발도 성적순, 한정된 모든 자원의 분배기준은 지금까지 거의 늘 성적순이었다. 이제 성적순이라는 기준을 벗어나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성적보다는 해당 기회에 더 적합한 자, 해당기회가 시급하게 필요한 자, 성적보다는 성과를 공동체에 잘 환원시킬 수 있는 자 같은 기준을 정해보는 건 어떨까. 불공정하다는 비난성 후폭풍도 생겨날 것이다. 이때 책임자가 맞을 비난을 회피하기에도 가장 손쉬운 기준이 성적순일 것이다. 이 게으른 행정편의주의까지 결합해서 학교현장은 더욱 성적기준이 횡행한다. 늘 불공정하다는 피해의식에 우리사회는 시달려왔다. 특혜와 불공정이 만연했던 오랜 독재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성적순이라는 기준은 신성불가침처럼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성적은 머가 그렇게 중요한가. 1점이 부족해서 당락이 갈리고 행, 불행으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틀, 이제 이 틀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시험도 '통과', '노력요함' 정도의 합격선 구분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서울대에 비난 여론이 비등했다는 것은 성적이 높다고 해서 문제해결능력이 우수한 것은 아니라는, 자신의 능력이나 힘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성적과는 무관하더라는, 어쩌면 반비례하기도 하더라는, 1등만이 대접받는 지독한 무한경쟁은 안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음을 반증한다.

코로나의 확산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비난도 커지자 다시 서울대는 졸업식 취소를 발표했다. 이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개인의 선택일 뿐 국가가 나서서 최고의 가치로 장려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모든 걸 공부로만 기준 삼는 관행이 바뀌어 가길 바란다.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