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상금(전 서울시의원)

 
 

나는 우정회(서울시의원 출신 친목단체)회원들로부터 가끔 해남은 자랑거리나 특색이 없다는 힐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해남에는 대흥사가 있고 그곳에 있는 전라도 천년을 상징하는 천년수를 아느냐? 또 땅끝 미황사 둘레길에서 남해 일몰을 경험한 적이 있느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법정스님 고향이 해남이고 고산 윤선도가 녹우당에서 살았으며 해남신문이 있다고 강변한다.

해남신문은 30여년 전 군단위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에 군민과 전국 각처의 향우들이 우리 사주가 되어 1990년6월22일 창간호를 발행했다. 나는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창간의 역사를 설명할 때면 어깨가 으쓱해진다. 왜냐하면 서울향우 공모주 모집 때 대표이사를 지낸 김갑술 친구와 함께 나도 일익을 담당했던 추억 때문이다. 몇 해 전에는 추가 공모주를 통해 100여명의 군민이 새롭게 참여하여 군단위 신문으로는 보기 드문 예가 되었다. 특히 충북 옥천군의 옥천신문, 충남 홍성군의 홍성신문, 경남 남해군의 남해신문과 더불어 해남신문은 군단위 4대신문으로서 위세는 지금도 여전하다.

해남신문이 지역독자로부터 사랑과 주목을 받는 이유는 군민의 신문이라는 독특한 지배구조와 정론직필의 힘이 크다. 그러나 초창기의 시론<우록만필>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필자는 오래전에 작고하신 <우록 김봉호> 선배였다. 김봉호 선배는 <보리봉호>라는 애칭으로 통했는데 이는 국회부의장을 지내신 5선 김봉호 선배님과 이름이 같아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우록선배는 서울사대 졸업 후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으로 소설, 희곡을 비롯하여 「생물학통론」·「초의선집」·「차의 효능」등 많은 저술이 있는 문인이다. 창간이후 6년 동안 300여편의 <우록만필>을 연재 했는데 글이 유머와 해학으로 가득차 독자들 가운데는 <우록만필>을 읽기 위해 구독할 만큼 인기는 대단했다. 그 후 1998년 「곡예사와 대통령」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기까지 저간 사정은 서문 대신 <책만>에 자세히 나와있다. 모두 160여편을 실었는데 해남신문 창간 30주년을 맞아 다시 펼쳐보니 감회가 새롭다.

첫 글의 제목은 <성희롱과 성교육>이다. 성희롱의 죄값으로 대학교수가 제자에게 3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문에 대한 단상으로 2년전 미투운동을 생각하면 30년전 글이지만 선견지명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책 제목으로 뽑은 <곡예사와 대통령>에서는 공중에 매달리는 서커스단의 곡예사와 나라의 운명을 몽땅 떠맡은 대통령의 처지가 흡사함을 일컫는 글이다. 글마다 지금 읽어도 당시의 사회상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명문이다.

창간 30주년을 거듭 축하하며 해남신문이 발전할 때 내 고향 해남의 발전도 기대할수 있으리라 믿으며 부디 창간의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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