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목현(광주광역시 민주인권평화국장)

 
 

5·18민주화운동은 한반도 민주화운동의 한 획을 긋는 금자탑이다. 5·18민주화운동은 18년간의 박정희 유신군부독재가 전두환 신군부 독재체제로 대를 이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온 몸으로 처절하게 투쟁한 살아있는 현대사의 증인이다. 5·18민주화운동이 있었기에 전두환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치열한 민주민중투쟁이 가능했고 그 에너지는 6월항쟁으로 분출하여 민주주의를 확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해남에서도 항쟁이 격렬하게 타올랐다. 해남은 넓은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인접 완도, 진도, 강진, 영암 등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전통적으로 민족운동과 민중운동의 숨결이 강하고 농민회 활동이 활발했다.

1980년 5월 21일 오전, 광주에서 출발한 시위차량이 해남읍에 도착하여 급박한 상황을 설명하며 군민의 지원을 호소하였다. 차 앞에 여고생이 태극기를 들고 애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광주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구름처럼 읍내로 몰려들어 박수를 치면서 격려했다.

21일 12시30분경 제일 먼저 해남청년회의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회복 등 5개 사항을 요구하고 시위를 벌였다. 오후 3시에는 광주에서 온 시위대에 호응하여 약 3천여 명의 해남 군민들이 교육청 앞 광장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오후 5시에는 광주에서 군용트럭, 버스, 트럭 등 시위차량이 대거 몰려오자 청년 등 500여 명이 차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저녁 9시에는 200여 명의 시위대가 차량 25대를 앞세우고 해남읍-현산면-송지면을 경유하여 완도읍에서 시가행진을 하였다.

22일은 새벽부터 차량시위대가 나타나 해남경찰서 무기고에서 총기를 획득하고 해남 군부대에 총기와 실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오후가 되어 시위대가 광주로 출발하자 해남 군민들이 자발적으로 흩어진 총기를 수습하여 군부대에 반납함으로써 해남읍에서 시위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렇지만 23일 새벽 우슬재와 오전 10시께 복평리 도로에서 시위대와 길목을 차단하고 지키던 군인들 간에 총격사건이 터져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발생한 사망자에 대해 최소 7명 이상의 시신이 암매장되었다는 제보가 있었지만 1995년 검찰수사에서도 밝혀지지 못했다. 최근 정부에서 구성된 <5·18민주화운동진상조사위원회>에서 진상이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 후 5월 27일 새벽 장갑차와 헬리콥터로 무장하고 공수부대를 앞세운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 진입하여 수백명의 시민을 학살하고 연행하였다. 5월 21일 해남에서도 수십명의 열혈 청년들이 시위차량에 올라타 광주에 가서 투쟁을 하다 희생을 당했다. 그 후 5월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1987년 6월항쟁으로 부활하였고, 이제는 세계로 뻗어가 최근 홍콩항쟁에서도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렸다.

5·18민주화운동은 민주 인권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국민들의 염원을 대변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수많은 민주민중운동을 기억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이 세상에서 누구도 억압받지 않고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고, 그 요구와 주장을 자유롭게 펴 나갈 의지와 용기를 가질 수 있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정신은 우리의 후대에 전승되어야 하고 미래로 확산되어야 한다.

올해는 5·18민주화운동이 40년을 맞는 해다. 공자(孔子)가 40세가 되니 모든 것에 미혹(迷惑)되지 않았다는 옛말이 있다. 40세면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성숙한 인격체가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5·18 40주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성숙한 인격체로서 5·18이 우리 인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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