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지 3동, 문지 1곳 등 확인
결과 바탕해 복원사업 신청

▲ 대흥사 심적암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자문회의가 지난달 29일 심적암 현장에서 열렸다.
▲ 대흥사 심적암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자문회의가 지난달 29일 심적암 현장에서 열렸다.

조선말 항일의병투쟁의 격전지로 일본군에 의해 전소된 대흥사 심적암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29일 자문회의가 열렸다. 심적암지 발굴조사는 (주)민족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지난달 31일까지 실시됐으며 해남군은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복원사업을 신청할 계획이다.

심적암은 대흥사의 남쪽 북사면부에 위치한 암자로 일본의 조선침탈에 맞서 끝까지 항전하다 110여년 전인 1909년 7월 일본군에 의해 많은 의병이 목숨을 잃은 한말 항일의병투쟁의 대학살 현장이다. 이 과정에서 심적암도 일본군에 의해 전소됐지만 방치된 상황이었다. 이에 오길록 해남항일운동 순국열사·애국지사 추모사업회장은 심적암 복원의 필요성을 정부에 지속적으로 건의해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는 심적암의 규모와 성격을 밝히고 이를 토대로 더 이상 유구가 훼손되지 않도록 체계적인 정비를 위해 실시되고 있다.

발굴조사단은 이번 조사에서 건물지 3동과 문지 1곳, 우물지 1기를 확인했다. 2동의 건물지는 조선시대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사용했으며 일제강점기 유리원판(1929~1940년)에 문지와 건물이 확인됐다.

1건물지는 정면 21m, 측면 16m 크기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마루가 설치된 것으로 파악됐다. 2건물지는 정면 13.1m, 측면 5.6m로 1건물지보다 작으며 아궁이는 건물의 서쪽에서 2개소가 확인됐다. 선행 건물지는 가장 먼저 축조된 건물지로 1, 2건물지가 사용했을 당시에는 이곳을 법당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출토유물은 건물지의 경우 조선시대 평기와가 중심을 이루며 일제 강점기 자기류가 소량 퇴족토상에서 확인됐다. 건물의 기단토에는 18세기 백자편이 출토되고 있어 18세기 해당하는 선행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한편 심적암은 해남에서 일어난 항일운동 근거지로 북평 성도암, 미황사 등과 함께 의병들이 산을 끼고 게릴라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미황사 의병들은 산악 게릴라전을 벌이기 위해 1909년 음력 7월 8일 대흥사 심적암에 도착하지만 의병들의 이동노선이 발각되면서 다음날 새벽 4시 일본 토벌대의 기습을 받아 전멸한다.

대흥사 심적암 전투에 대해 일본 경찰문서 전남 폭도사에는 '1909년 음력 7월 8일 밤, 해남수비대장 오시하라 대위 이하 22명, 경찰관 3명, 헌병 4명이 적도 토벌을 목적으로 대흥사로 출동했다. 1909년 7월 9일 오전 4시 절을 포위 공격했는데 적도는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전멸했다. 적 22명을 죽이고 8명을 포로로 했으며 화승총 47점, 군도 5점을 노획했다. 9월 18일 황두일의 부하 21명, 19일 4명이 해남수비대에 투항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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