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동화 압력 넘어 미래로
'등불 밝혀 어둠 몰아내리라'

 
 

|싣는 순서|

① 한민족과 디아스포라
② 재일코리언의 역사
③ 재일코리언의 현실 Ⅰ(오사카 코리아타운)
④ 재일코리언의 현실 Ⅱ(교토 우토로마을)
⑤ 재일코리언 마이너리티로서의 정체성
⑥ 차별과 동화 압력을 넘어 미래로
⑦ 다양성과 관용 가치실현을 위한 지역의 과제

 

 

 

▲ 채플 앞 윤동주 시비.
▲ 채플 앞 윤동주 시비.
▲ 교토 도시샤대학 캠퍼스.
▲ 교토 도시샤대학 캠퍼스.

'시계추의 법칙'은 시계추가 규칙적으로 오른쪽, 왼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사회현상도 어떤 상황이 종국에 도달하면 그 반대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것이 또다시 극점에 도달하면 다시 반대쪽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일정한 주기로 반복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이산한 동포사회에도 적용된다. 이민 1세는 죽을 때까지 조국을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는 반면, 2세는 1세에 대한 반발과 함께 현지 적응의 성향을 보이고, 3세는 할아버지 나라에 대한 동경심과 호기심으로 이민 1세들의 애국심과는 결이 다른 문화운동 등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4세, 5세, 6세까지 등장하면서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라난 재일코리언들은 혈통은 한국이지만 사고방식이나 생활습관은 오히려 일본인에 가깝다. 그들이 앞으로도 자연스럽게 살아갈 곳은 일본땅이며 시간이 더많이 흐르면 재일 코리언의 개념·정체성은 더욱더 모호해질 전망이다.

해방 당시 일본에는 200여만명의 한국인이 있었으나 귀국을 위한 선박사정이나 경제적으로 불리한 귀국조건 때문에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일본에 남은 재일한국인이 60여만명에 이른다. 그들은 외국인 등록시 '조선'이라는 무국적 상태에 처하면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2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의 경우는 나치독일에 병합되었던 오스트리아인에 대해 '독일 국적을 유지하든지 오스트리아 국적을 회복하든지' 개인 선택을 보장했다. 프랑스 경우도 식민지 알제리 독립시 프랑스 내 알제리인은 프랑스나 알제리 국적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일본내 재일조선인들은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 이들이 빼앗겼던 한글을 다시 배우고 권리옹호를 위해 조선인 연맹을 결성한 것이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과 재일조선인거류민단(민단)이 조직되었으나 초기에는 조련계 세력이 월등히 우세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은 평화선 문제 등으로 일본과 대립하면서 일본 내 우리 국민에 대해서는 '일본에 귀화하든지 하라'는 소극적 정책으로 일관한 것에 비해 북한은 일본내 동포는 모두 북한 공민이고 북한은 이들을 위해 책임을 다할 것이며 일본에 권익을 존중해 줄 것을 요구했다. 막대한 교육자금도 지원했다.

남한정부는 1965년 국교정상화시 한국내 반발보다 더 적극적인 재일조선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상3억불 유상2억불에 재일동포들의 법적지위를 일본요구대로 합의했다. 이 협약에 의해 재일조선인들은 특별영주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의 발포로 육영수 여사가 암살되면서 일본 내 민단과 조총련 간의 충돌은 더욱 거세졌다. 이에 한국정부는 민단원들에 대한 50시간 민족교육,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모국유학 확대 및 조총련계 한국 방문 허가 등의 정책을 시행하고 한국의 경제발전이 가속됨에 따라 재일코리언 사회의 저울추가 한국으로 기울게 되었다.

재일코리언들은 일본 내 차별과 동화 압력 속에서도 조국 발전을 위해 갖가지 노력을 해왔다. 경제개발시기 구로공단 및 구미공단 투자, 88올림픽때 540억여원에 이르는 성금 전달 및 '재일한국인 투자협회'를 결성하여 신한은행을 설립하는 등 경제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일본에서 아베정권이 들어선 이후 정치인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과거사 왜곡, 자위대의 군대로의 전환,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전환을 시도하는 우경화의 흐름이 지속적의 강화되고 있다.

2007년에 발족한 재특회(在特會·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는 대표적으로 한국을 혐오하는 단체로 재일코리안의 특별영주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반대하는 단체이다.

도쿄와 오사카의 코리아타운에서는 이들의 과격한 혐한시위와 헤이트 스피치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배타적인 섬나라 특유의 속성에 '잃어버린 20년' 이후 계속되는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울분이나, 사회적 분노를 상대적 약자를 향해 터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에는 윤동주 시비가 있다. 이 대학 영문과 재학중 윤동주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특고 경찰에 검거되었다. 창씨개명과 국어사용금지, 공출과 징병 등 식민지배의 어둠 속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몸부림쳤던 시인 윤동주'는 어둠 속에서 하나의 등불을 켜듯 식민지배의 어둠이 깊어갈 때 등불을 켜고 해방의 아침을 염원했다. 그는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1945년 2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정신처럼 재일코리언들이 그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꿋꿋히 살아온 배경에는 재일코리언들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함께한 일본 내 시민사회와 양심세력의 도움도 적지 않았음을 간과할 수 없다. 공생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일본내 시민사회 및 양심세력과 연대에 노력해나가야 한다. 재일코리언들이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국가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야키니쿠 드래곤'은(2018, 燒肉ドラゴン, Yakiniku Dragon)이방인 재일조선인의 아픔을 그려낸 영화로 재일코리언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정의신 감독이 동명 연극을 각색한 작품이다. 2018년 전주국제영화제에 개막작으로 상영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전쟁에 징병되어 왼팔을 잃은 주인공 용길(김상호)은 장녀 미화와 차녀 이화, 4·3사건으로 아픔을 안고 고향 제주를 떠나온 영순(이정은)은 3녀 미화를 데리고 재혼해 가족을 이룬다.

두 사람은 국유지를 불법점유해 형성된 마을에서 '야키니쿠 드래곤(용길이네 곱창집)'이라는 가게를 개업하고 그 후 아들 도키오가 태어난다.

영화의 배경은 고도성장기에 접어든 오사카국제박람회 직전인 1969년 봄으로 부부는 막내아들을 사립중학교에 보내면서 교육에 대한 열망을 갖지만 학교에서 따돌림 때문에 실어증에 걸리고 결국은 자살하고 만다.

불법점유 상태였던 마을과 가게는 강제철거되고 큰딸은 북송사업으로 북한에, 둘째딸은 한국으로 이주, 셋째딸은 나이트 클럽 지배인인 일본사람과 결혼해 뿔뿔이 흩어진다.

고향을 향한 애증과 갈등 속에서 어제는 힘들었어도 내일은 해낼 수 있다는 가족을 향한 부부의 희망과 믿음, 흩어지더라도 가족은 이어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가족 간 화해, 사랑을 그리고 있다. 한국과 일본 경계에 서서 살아가는 재일코리언들의 삶과 잊혀가는 그들의 역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우리들의 역사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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