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들 고난의 현장
공동체 유지·역사보전 필요

▲ 마을회관과 우토로 마을의 유일한 재일조선인 1세대 강경남 할머니.
▲ 마을회관과 우토로 마을의 유일한 재일조선인 1세대 강경남 할머니.
▲ 철거된 마을부지를 새롭게 신축한 40가구 규모 시영주택.
▲ 철거된 마을부지를 새롭게 신축한 40가구 규모 시영주택.
▲ 남아있는 우토로 마을 흔적.
▲ 남아있는 우토로 마을 흔적.

 

 
 

|싣는 순서|

① 한민족과 디아스포라
② 재일코리언의 역사
③ 재일코리언의 현실 Ⅰ(오사카 코리아타운)
④ 재일코리언의 현실 Ⅱ(교토 우토로마을)
⑤ 재일코리언 마이너리티로서의 정체성
⑥ 차별과 동화 압력을 넘어 미래로
⑦ 다양성과 관용 가치실현을 위한 지역의 과제

 

교토부(京都府)우지시(宇治市)시내에 1987년까지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 있었다. 재일코리언 약 60세대 250명이 살고 있는 우토로(ウトロ)51번지 2015년 인기 TV프로그램 '무한도전'을 통해서 우리 국민들에게도 친숙해진 재일조선인 마을이다.

'우토로' 라는 지명은 옛날에 우지로 연결되는 땅이라는 의미로 우토구치(宇土口)로 표기되었지만 口가 가타가나「ロ」(ろ)로 읽혀지게 되고 편의상 우토로로 표기되게 되었다.

우토로에 재일조선인이 살게된 것은 1940년경으로 일본내 5개소 군사비행장을 건설하는 계획으로 그중하나가 1940년 공사가 시작된 교토비행장이다.인해전술로 저임금과 중노동이 요구되었던 이 공사에 종사했던 2000여명중 1300명이 조선인 노동자였다. 전후 일본으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재일조선인 노동자와 가족이 살아온 곳이다.

조선에서 주로 농민들이었던 노동자들은 토지조사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토지를 빼앗기고 고향에서 살기 힘들어지자 일본으로 건너와 주로 저임금 육체노동에 종사하며 징병에 대한 두려움이 있던 사람들이 '국가사업이라 징병을 면제한다'라는 비행장공사 정보에 일본각지에서 모여들었다.

공사장 인부는 징병면제에 가족도 함께 함바(飯場)라는 집단숙소에 거주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 중 하나였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구릉지와 늪지대를 삽으로 퍼내 토사를 광석차에 실어 비행장 활주로 운반 삽으로 평탄하게 고르는 작업을 새벽부터 일몰때 까지 계속했다. 쉬면 임금이 없으므로 상처를 입거나 병이나도 쉬지 못하고 중노동에 종사했다. 일본항복으로 일본식민지배에서 벗어낫다며 마을 잔치를 벌인 기쁨도 잠깐, 비행장 공사는 중지되고 비행장과 공장은 GHQ에 접수되어 미군기지가 되면서 일자리가 없어졌다.

재일조선인들이 일했던 국책회사 일본국제항공공업은 이름을 바꾸어 미군에 트럭이나 버스를 생산하는 신일국공업(1962년 일산자동차 일산차체로 변경)으로 바뀌었다.

구회사의 자산정산 대상에 우토로 지구도 포함되었지만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은 임금이나 생활보상도 받지 못하고 방치됐다. 우토로 재일조선인들은 폐품수집, 건축공사장의 날품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갔다. 주변 땅에 감자를 심어 식량을 해결하고 미군기지에서 탄피를 주어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열악한 환경임에도 우토로에는 재일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 일본인사회보다도 재일조선들이 사는 우토로가 더 살기 편하고 고향소식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토로는 한반도로 귀국하는 거점지역, 정보센터의 역할을 했다.

건물 한 채를 교실로해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민족학교를 개설하였으나 1949년 일본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우토로 마을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오쿠보 기지가 미군병참기지였다. 신일국공업은 폭탄과 차량을 만들어 미군에 납품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겼지만 우토로 주민들은 그런 씁쓸한 상황 속에서 1952년 3월에는 무장미군 100여명의 추방위협에도 결사각오로 맞서면서 삶을 이어갔다. 귀국하고 싶어도 돌아가서 살 집도 없고 돌아갈 여비도 없고 한반도정세 불안정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우토로 주민들은 그대로 눌러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전쟁 전의 함바와 같은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서 우물물에 의존하며, 저습지대라서 비만 오면 침수되는 환경과 비가 그치면 빗물과 함께 휩쓸려온 쓰레기더미와 해충 속에서 삶을 이어갔다.

주거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경제적여유가 생긴 것은 1970년대 들어서서 기존건물을 헐고 신축하거나 리모델링이나 개축하면서 오랫동안 살아왔으므로 여기는 내집이다 라는 생각이 일반적 이었다. 우토로주민들 간에는 외지로 떠나가는 경우에는 서로 집을 사고팔기도 했다. 재일조선인 사이에는 공통의 가치관에 기반한 재일조선인 공동체와 사회규범이 형성되면서 그 안에서 생활이 이루어졌다.

상수도가 설치된 것은 1987년으로 우토로는 우지시내에서 유일하게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았다. 주민들은 우지시 에 수없이 탄원서를 냈지만 설치가 안 된 이유는 토지소유권자인 일산차체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지시에 세균성 이질이 집단발병, 보건소의 검사 결과 우토로의 우물물은 음용수로 부적합이라는 판단때문에 겨우 일산차체의 동의를 얻어 주수도관이 설치되고 여기서부터 각 가정까지는 개인부담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1987년 부동산회사 서일본식산에 토지가 전매되면서 주민전원에 대한 퇴거명령에 대해 주민들은 재일조선인들이 개척한 사실을 들어 시효취득을 인정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 했지만 1998년 패소로 퇴거가 불가피해졌다.

이런 사실이 언론과 한국기독교협의회 등의 활동으로 알려지면서 대한민국정부와 국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원래부지 6000평의 1/3에 해당하는 2000여평 토지를 구입하게 되어 재일코리언들의 거주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2018년 1월 1차로 40가구의 시영주택이 완공되었고 2차로 20가구 규모 시영주택이 건설될 예정으로 있다.

우토로 마을은 대부분 철거되어 말끔하게 건축된 아파트와 철거된 부지 건너편 마을회관 옆으로만 아직 철거되지 않은 마을의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옛 마을 폐가에 아직도 남아있는 '우토로는 재일조선인의 고향, 우토로는 반전 기념비, 우토로를 없애는 것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없애는 것, 우토로를 없애는 것은 일본의 전후를 없애는 것, 우토로를 없애는 것은 일본인의 양심을 없애는 것' 이라고 씌여진 간판이 대변해주듯 마을 역사기념관이 건립되어 재일조선인들의 고난과 삶을 기억하는 공간과 역사를 보존해 나가는 것과 달라진 주거환경으로 인한 지역공동체의 변화를 어떻게 복원 유지해 나갈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 아직 정정하신 할머니와 동전 350엔.
▲ 아직 정정하신 할머니와 동전 350엔.

 

우토로마을의 유일한 재일조선인 1세대 강경남 할머니(95세)

할머니는 경남 사천 용현이 고향이다. 아버지가 먼저 일본으로 건너온 후 8살 때 가족이 오사카로 와서 열여덟에 시집을 갔다. 아버지 오빠가 우토로 비행장에 일하고 있었고 징병이 안된다고해 남편도 그곳에서 일했다.

 
 

전쟁이 끝난 후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삶의 터전으로 가꿔온 이곳이 강제퇴거명령과 함께 철거한다고해 일하다가도 사이렌이 울리면 마을사람들이 합심해 투쟁했다고 말해주었다. 한국 고향마을에 한번 가본적이 있다며 살아오신 이야기를 경상도 사투리에 일본말을 섞어서 이야기 하시다 중간에는 노래도 부르셨다.

할머니는 이렇게 더운 날 뭐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하면서 어디에서 왔느냐고 몇 번이고 물어보셨다. 한 달 생활비로 아들에게 3000엔을 받는데 저녁식사는 인근 딸집에서 해결하고 아침식사는 식빵과 커피 한 잔으로 해결하신다 했다. 준비해간 선물을 전해드리니 "집에 가도 뭐 시원한 것 하나 대접할 것이 없어 정말 미안타"라면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갈 때 마을입구에 자판기가 있으니 시원한 것 하나 꼭 사먹으라 하시면서 몇 번이고 거절했으나 손에 350엔을 꼭 쥐어주셨다.

할머니는 95세 나이에 비해 정정해 보였지만 삶의 추억이 서린 공간이 사라지고 가물가물해지는 옛기억을 아쉬워했다. 마을회관 앞에 쓰인 '우토로에서 살아왔고 우토로에서 죽으리라'는 글귀처럼 한사코 우토로 옛집을 고집하는 할머니가 건강하시길 기원하며 우토로 마을을 돌아섰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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