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일본 속의 제주'
투쟁을 통해 자기정체성 지켜내

 
 

|싣는 순서|

① 한민족과 디아스포라
② 재일코리언의 역사
③ 재일코리언의 현실 Ⅰ(오사카 코리아타운)
④ 재일코리언의 현실 Ⅱ(교토 우토로마을)
⑤ 재일코리언 마이너리티로서의 정체성
⑥ 차별과 동화 압력을 넘어 미래로
⑦ 다양성과 관용 가치실현을 위한 지역의 과제

 

 

 

▲ 오사카 코리아타운 상점가 입구 백제문.
▲ 오사카 코리아타운 상점가 입구 백제문.
▲ 우리 재래시장과 다를바 없는 모습으로 상점가 반찬가게에는 갖가지 김치가 판매되고 있다.
▲ 우리 재래시장과 다를바 없는 모습으로 상점가 반찬가게에는 갖가지 김치가 판매되고 있다.

오사카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 역사가 살아 숨쉬는 쓰루하시(鶴橋) 상점가와 새롭게 형성된 코리아타운은 재일코리언들의 삶의 이야기와 끈끈한 정이 살아있는 터전이다.

코리아타운 입구에는 미유키모리(御幸森)신사가 있는데 경내에는 오래전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를 기념하는 '난바나루터노래비'가 있다. 1600여년 전 백제 왕인박사가 미유키모리신사 제신에게 '나니와즈우다'라는 와가(和歌)를 보낸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일본어에는 구다라나이(下らない)는 '시시하다, 형편없다'는 의미인데 구다라(くだら)는 百濟를 의미해 백제에서 전래된 문물이 그 당시에는 최상급이었기에 백제에서 온 것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것에 어원이 있다고 말해진다. 오사카는 한반도와 교류 역사가 깊고 그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는 지역이다.

- '일본속의 제주' 오사카 이쿠노구(大阪生野區)

오사카 이쿠노구는 '일본속의 제주'라고 불리울 만큼 생활 전반에 제주도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재일코리언 약 15%가 제주도가 본적이고 오사카 이쿠노(生野區)는 구인구 4.5명당 1명이 재일코리언으로 일본에서 밀도가 제일 높은 구이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생모인 고영희 역시 1952년 오사카 쓰루하시 출생이다. 할아버지 고경택이 1929년 제주에서 오사카로 이주한 후 다시 북한으로 이주했다.

1922년 제주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정기여객선 기미가요마루(君代丸)가 취항하면서 당시 군수산업과 공업이 발달했던 오사카에 많은 제주도민들이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인공동체와 조선시장이 형성되었다. 제주 4·3사건도 제주민들의 이주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들은 대부분 고무 산업에 종사했던 관계로 현재도 일본 샌들제조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과거 조선시장은 시장 전체가 정비되지 않아 불결하고 저습지대의 눅눅한 환경과 김치, 마늘, 돼지고기 삶는 냄새 등으로 인해 일본인들에게는 기피 대상이었지만, 재일조선인들에게는 향수를 달래주는 역할을 했다.

'돼지는 울음소리만 빼고는 모든 것을 먹는다'는 말처럼 불고기와 일본사람들이 먹지 않았던 내장(호루몬)요리는 미리 양념된 고기를 구워먹는 한국식 불고기와는 달리 고기를 부위별로 세분화하여 입맛대로 주문할 수 있게하고 생고기를 판에 구워 별도로 만들어진 '다레'라는 양념장에 찍어 먹는 일본화된 야키니꾸(燒肉)는 일본인들에게도 친숙한 요리가 되었다. 오사카 쓰루하시상점가 대표요리로 자리 잡았다.

재일조선인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공무원이나 교사·대기업에 취업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교육열이 일본인들 보다 높았던 재일조선인들은 의사와 같은 전문직이나 자영업에 종사할 수 밖에 없었고 자영업은 야키니꾸나 파친코가 대표적인 업종으로 인식되었다.

▲ 1948년 벌어진 한신교육투쟁. <사진:위키백과>
▲ 1948년 벌어진 한신교육투쟁. <사진:위키백과>

- 한신(阪神) 교육투쟁

"총칼이 아무리 세도 머리속 지식은 빼앗을 수 없다"며 재일조선인들이 온몸으로 저항한 한신교육투쟁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지령을 받은 일본정부가 '조선인학교 폐쇄령'을 발령하자 1948년 4월 14일부터 4월 26일까지 오사카(大阪)및 효고(兵庫)에서 벌어진 민족교육투쟁이다.

식민시기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황민화 교육으로 조선어를 읽고 쓰기가 어려웠다. 재일조선인들은 자체 제작한 교재로 주택이나 공장 등에서 국어강습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조선학교로 개편되어 일본 전국각지에 500여개교 6만여명의 학생이 있었다. 1947년 10월 GHQ는 재일조선인은 일본교육 기본법, 학교 교육법을 따르도록 지령을 내려 조선인학교는 폐쇄하고 학생들은 일본학교에 편입시키도록 했다.

식민지도 아닌데 조선어교육을 못하게 하는 것에 반발해 재일조선인과 일본공산당원이 오사카부 지사실을 점거하고 2만여명이 오사카성앞 공원에서 일본무장경결대와 충돌했다.

GHQ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일본경찰의 발포로 당시 16세 김태일(金太一)군이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1732인이 검거되고 136명은 군사재판에 넘겨져 중노동형이나 국외추방 되었다.

1948년 5월5일 재일조선인연맹 교육대책위원장과 문부대신 사이에 교육기본법과 학교교육법을 준수하되 사립학교 자주성 범위안에서 조선인의 독자적 교육을 인정하고 조선인학교를 사립학교로 인가한다는 내용의 각서가 교환되므로 사태가 마무리 되었다.

이 사건은 GHQ가 일본학교에 가면 되지 왜 민족학교가 필요한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당시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사회 하층계급으로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GHQ는 민족학교 문제를 교육보다는 치안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재일조선인을 일본에서 내쫓고 싶어했지만 맥아더는 재일조선인 귀국 시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우려와 불안감, 이해관계가 복잡한 문제를 본인 임기 중에 처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9년 중화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성립과 소련 핵실험 등 동서냉전 심화 속에서 미국은 제국주의 일본의 민주화를 목표로 했던 점령정책을 동서냉전 최전선인 한반도를 두고 태평양 안전보장과 공산세력 억제를 위한 초석으로 일본을 중시하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전쟁책임을 묻지않고 천황제 유지를 용인한 미국의 태도 변화가 일본 우경화 빌미를 제공했기에 한일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수 밖에 없게된 근본 원인이다.

재일코리언들이 일본사회에서 이만큼 자리잡고 있는 것은 자기권리를 지키기 위해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 꽃 무궁화가 다시 피었다" 노래를 부르며 한신교육투쟁 시 저항했듯이 지남 역사속에서 일본의 차별과 배제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저항해 온 결과물이다.

 

 

▲ 오사카 쓰루하시 상점가에서 해남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변양삼<오른쪽>·임선영 부부. 남편 변양삼 씨는 해남 문내면 난대마을이 고향이다.
▲ 오사카 쓰루하시 상점가에서 해남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변양삼<오른쪽>·임선영 부부. 남편 변양삼 씨는 해남 문내면 난대마을이 고향이다.

오사카 쓰루하시 '해남식당'

오사카 쓰루하시 전철역 길건너편 쓰루하시 상점가에 해남식당이 있다. 한국가정요리를 전문적으로 하는 해남식당은 변양삼·임선영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남편 변양삼(54)씨는 '문내면 난대마을', 부인은 '충북 괴산' 출신이라고 했다. 현재는 인테리어 분야 사업을 하고 있으며 식당은 부인이 주로 운영하고 있다. 어머니 윤순엽 여사는 아직도 해남 고향마을에 살고 있다.

1990년 일본어 전문학교에 유학을 와서 자리잡고 살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이주한'올드커머'와 달리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일본으로 이주해서 사업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뉴커머' 인셈이다.

 
 

날로 악화되고 있는 한일관계에 대해서 물어보자 "현재 별다른 어려움은 없다" 라고 말하면서 "아직까지는 주말에 코리아타운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건강하고 아이들이 잘 커줬으면 한다.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돼 가보고 싶고 어머니도 뵙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변양삼 씨 본인은 1년 단위로 체류비자를 갱신하고 있고 부인은 3년 단위로 갱신한다고 했는데 지금처럼 날로 한일관계가 악화된다면 재일코리언들 체류지위에 혹시나 불이익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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