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상금(전 서울시의원)

 
 

8월 18일은 김대중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모일이다. 나는 10년 전 김대중대통령 서거 추모 특집으로 발행했던 모 중앙일간지의 스크랩북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다. 오늘의 꽉 막힌 여야의 정치 현실과 남북관계 및 한일관계를 생각하면 정치9단이라는 별명처럼 대통령의 뛰어난 안목과 통치술이 그리워진다.

특히 금년 4월에는 대통령의 장남이자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 김홍일 전 의원이 별세하고 6월에는 아내이자 인권운동의 동지였던 이희호여사까지 서거하여 슬픔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나의 멘토가 되어 주신 대통령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김대중 대통령과 나의 인연은 참으로 멀고 오래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시험을 보기 위해서 상경해 재수, 삼수까지 실패하고 방황하던 시절 김홍일 의원을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 공개된 김 의원의 학력과 경력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화려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신실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부조화의 조화라고 말할 수 있다. 엄청난 격차가 오히려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 두 번째는 불가근불가원 이라고 서로 공감하고 배려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옛날 시골에서 친구 부모님을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던 것처럼 나도 사석에서는 대통령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다. 특히 인연을 중요시하는 나의 성격 탓에 더 가까이 따랐다.

이런 인연으로 하여 정치에 발을 담가 지금까지 중앙당에서 여야 가리지 않고 당료생활 40년에 제4대 서울시의원과 토지공사 감사를 역임할 수 있었다. 대통령께서는 정치적으로는 총칼 앞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심은 오히려 무척 자상하고 세심하여 여성적인 심성을 타고 나셨다. 꽃과 개와 새를 남달리 좋아하고 사랑했다.

또 자신에 대해서는 이상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며 오직 민족의 장래를 걱정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양심에 호소했던 행동하는 양심은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또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를 실현하고자 애쓰는 실용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김대중 내란음모라는 있지도 않는 죄명으로 감옥에 있을 때는 2년 동안 600권의 책을 읽을 만큼 독서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감옥살이 시절을 '지적 행복의 나날'이었다고 고백하신 적도 있다.

책도 10권 넘게 저술했으며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는 70쇄를 찍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감옥에 계실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649통의 편지를 썼고 가족으로 부터는 600여통이 넘는 편지를 받아 이를 책으로 발간한 '김대중 옥중서신'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당시에는 편지지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어 관제엽서에 1만4000자를 빼곡히 적은 '엽서 편지'는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날 세계적 유력 언론사 AP통신은 고인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사실과 함께 민주주의와 인권옹호의 챔피온으로서 명성을 얻었다고 전하고 있다. 나 개인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어려울 때 일수록 김대중 대통령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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