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기(해남문화원 이사)

 
 

조선왕조(1392~1910년)의 호구(戶口) 통계 중심으로 해남인구를 검토하고자 한다.

조선 초기에는 별다른 인구 변화가 없었다. 초기 인구수는 약 550만명 가량이었지만 200년 후인 16세기를 전후해 농업 기술의 발달로 인구는 1000만명을 돌파하며 인구가 증가하였다. 17세기 무렵 한 차례 부침을 겪기도 했다. 18세기 후반 이후와 19세기는 정체와 감소하였고, 20세기는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인구추세는 일본보다는 중국과 비슷하였다.

조선시대의 평균 인구수는 약 540만명, 호수(戶數)는 130만호, 호당 인구수는 4.2명, 성비는 남자가 여자의 94%, 인구증가율은 약 0.2% 정도였다. 이중 인구 급증은 1890년 우두법의 보급과 위생상태의 개선으로 유아사망률이 낮아지면서 조선사회는 20세기를 전후하여 다산다사(多産多死)에서 다산소사(多産少死)의 인구는 1800만명이었다.

인구감소는 임진왜란(1592~1597년)에 의한 인명 손실은 170만명의 절반이 굶어 죽었다. 병자호란 2년 후인 1639년에는 152만여명에 불과하였다. 실제로 해남은 일본군의 주요 침입로(侵入路)가 아니었고, 성웅(聖雄) 이순신의 혜택을 많이 봤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사회가 식량이 풍부해지면 출생률이 높아지고 사망률이 낮아져서 인구 증가율이 높아지지만, 자원에 비하여 인구가 많아져 인구 압력이 높아지게 되면 출생률이 낮아지고 특히 사망률이 높아지게 되어 인구 증가율이 낮아지고 심하면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

조선시대의 15~19세기까지의 전결(田結: 논밭에 대하여 물리는 세금 수)은 평균 140만 정도다. 세종조에는 160여만 결(結)로 격증하게 되었다. 반란과 민란이 없었고 살기가 좋았던 시기였다. 이와 함께 임진왜란 직전에 150만결이었던 경지도 전쟁 직후인 1601년에는 30만여 결로 줄어들었다.

17세기에는 인구 압력이 해소되고 경제상황이 호전돼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버려졌던 경지가 다시 개간됐으며 1688년께에는 '산골짜기 사이와 바닷가의 조그만 토지도 모두 개간되어 실로 노는 땅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비변사등록 숙종 14년) 이때 이전부터 해남간척지는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14개 읍면이 모두 바다에 접해있어 약 1500여개의 간척이 조성되었다고 본다. 한반도는 1년에 1cm 융기(隆起)가 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유라시아판은 매년 동쪽으로 3~4cm 정도 움직인다. 현재까지 300년이라면 3m 정도 높아지면서 동쪽으로 약 10m 정도가 움직였다.

이호철 교수의 경제논집에 따르면, 1800년대(1800~1810)를 기준으로 한 국토(國土) 평당 ㎢당 인구밀도를 추계해보면, 경상(112명), 서울과 경기(105명), 전라(100명), 충청(95명), 황해(64명), 평안(59명), 강원(29명), 함경(23명)이었다. 서울과 경기도의 높은 인구밀도를 제외하면 이는 바로 토지생산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 때 해남면적은 약 1천㎢로 10만 명이 살았다고 본다. 그 당시에는 많은 인구이며, 바닷가에 접해 있어 자연환경이 좋아 10만 명 넘는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해남 인구는 7만5000여명으로 조선시대보다 2만5000여명이 적은 인구가 살고 있다. 진즉 토지생산성과 판로를 고민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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