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기(해남문화원 이사)

 
 

고려(高麗)는 918년에 태조 왕건이 건국하여 공양왕까지 474년간 존속되었고, 1392년 이성계의 정변에 멸망하였다.

고려 국토 면적의 변동은 있으나 남쪽에서 북쪽인 함흥과 신의주를 포함하면 약 15만㎢이다. 현재 남북한 전제 면적이 약 22만㎢이며, 해남은 1000㎢이다. 필자는 고려 인구를 면적 비율로 추정하여 분석한다.

고려의 인구를 다룬 사료는『송사(宋史)·고려전(高麗傳)』의 다음 기록이다. "무릇 3경, 4부, 8목, 118군, 390 현진, 3700 주도인데 군읍의 작은 것은 단지 100가였고, 남녀는 210만구로 병, 민, 승이 각각 그 하나에 거(居)하였다" 이에 따르면 고려의 전체 인구는 210만명이었다. 이는 중국측의 기록으로, 숫자의 신뢰성은 의문이다. 따라서 인구를 추정하는 방법의 한 가지는 기록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인구 기록으로부터 역추적하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 초기 인구를 비정(比定)해야 하는데 학계에서는 대체로 500만명 내외였다는 주장에(권태환, 신용하) 동의하는 것 같다.

조선에서 신뢰할 만한 인구조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세종 32년(1450년)인데, 여기서 호가 70만에 남성 인구가 210만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3세기에 몽골의 9차례 침략 가운데, 특히 5차(1253, 고종 40)와 6차(1254~1259, 고종 41~46) 침입은 그 이전과 성격이 달랐다. 이전 네 차례의 침입은 대개 가을에 침입해 물자를 약탈하고 봄에 철수하는 단기전의 성격이 강했다면, 5~6차는 고려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고려사. 권24, 고종 41년>에 따르면 "몽골 침략은 1231년부터 1259년 사이 몽골군에게 사로잡힌 남자와 여자는 무려 20만 명 이상이었다. 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다. 몽골의 병난이 있은 이래 금년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로 기록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약 10~20%인 50~100만명이 피해를 입은 것이다. 원나라는 고려인 포로들을 심양과 요양에 거주하게 하였다.

14세기 중반 공민왕 때 고려의 인구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가장 큰 요인은 왜구[倭寇]의 침략일 수 있다. 1350년부터 1380년 황산 대첩(현재 지리산 부근)의 승리까지 30년간 왜구들은 고려의 해안을 마구 유린했다. 고려 조정은 진지하게 천도를 고려하기도 했다. 이때 지역 주민들이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한 채 수시로 피난을 다니고, 때로는 살육했기에 최소한 인구를 정체시키는 데는 기여했을 확률이 크다. 하지만 이성계 등 무인들의 활약으로 1380년대에 왜구의 침략은 사라졌다.

자연적인 남북한의 해안선 길이는 총 8600㎞인데 이중 남한지역의 해안선은 약 6000㎞로 해남지역은 해안에 접해 있어 이 시기에 많은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12세기 이후 고려인구와 해남인구의 시대별 변화 추이를 보면, 12C 초에 고려 약 300만명, 해남 2만명. 13세기 초 몽골 침공 직전에 고려 350~400만명, 해남 2만3000~2만7000명. 1259년 몽골 침략직후에 250~300만명, 1만7000~2만명. 1392년 조선 건국에 500만명 내외, 해남 3만4000명 내외였다.

전쟁을 대비하되 전쟁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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