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농부)

 
 

주변의 자연 생태계를 둘러보면 한결같이 숲이든 바다든 강이든 그 안에는 어느 한 종류의 생명만이 살지 않는다. 누가 강제로 조정하지 않은 자연 생태계의 힘은 그 다양성에서 나온다. 밭에 어느 작물 하나만 계속 심는다면 그 밭은 오래 못 간다. 이것저것 심어야 땅심도 강해지고 병충해에도 강해진다. 만약에 산에 풀 한 포기 없이 한 종류의 나무만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 숲은 병들고 죽은 산이다. 다양한 식생의 나무들이 어우러져서 산을 만드는 것이다. 바다에 한 종류의 물고기만 산다고 해보자. 그건 생명을 잉태한 바다가 아니라 죽은 바다다. 자연은 그런 바다를 가진 적이 없다.

아이를 공부만 잘하는 아이로 키운다고 생각해 보자. 예술도 모르고 운동도 모르고. 커서 무엇이 될까. 학교 전체가 다양한 학습은 모두 폐기하고 오로지 입시에만 몰입한다고 보자. 결과가 무엇일까. 좋은 대학 많이 들어간 학교가 명문인가. 영재는 좀 많이 키웠을지 모르나 인재는 한 명도 못 키웠으리라. 이것이 입시교육과 취직교육의 폐해이다. 한국사회의 깊은 골병이다. 소위 대한민국의 영재들이 모였다는 서울대, 그것은 한국의 미래인가 병폐일까. 다양성이 살아있는 교육은 선생과 학생이 살아있는 옹골진 학교를 만들고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단일민족을 강조해 왔다. 그것이 좋을까. 다양성이 사라진 사회는 억지의 힘이 강해진다. 신라의 신화를 보더라도 다민족이고, 심지어는 단군 신화를 보더라도 다양한 동물군의 혼합 민족이다. 단일성을 강조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폭력이 가면을 다양하게 쓰고 나타난다. 권력의, 지역감정의, 돈의, 위아래 기수의 폭력 등등. 하나만 인정하다 보니 독재도 좋다 하고, 심지어는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쓸어버리고 등장한 군사정권도 좋다고 한다. 이런 사회에서 등장한 새마을운동은 시골 초가집들을 무조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꿨다. 군대식 일렬종대 질서의 폐해다.

조선의 봉건 질서, 오랫동안 양반 쌍놈 사회로 길들여진 사회 질서가 물러가자 그 자리를 강제로 일제가 차지하고, 이승만 독재가 이어받고, 박정희 군사독재가 떵떵거렸다. 지금도 그 망령들은 온 데를 쫓아다니며 패륜을 일삼는다. 일방독주를 추억하면서,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나라의 구조도 일방으로 쏠리면 기필코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난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인구 집중이 한국의 지역균등 발전을 가로막고 있지 않은가. 경상도로 집중된 부와 정치권력의 집중이 이제 새로운 한국의 도약을 잡는 걸림돌로 버티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해남 읍내에 가면 군 인구는 줄고 있는데 주거 빌딩(아파트)은 계속 등장한다. 해남도 인구 집중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읍내로 읍내로만 향하는 개발과 경제 집중은 해남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일반 면 단위의 초중등 학교는 폐교 위기에 처해있지만, 읍내 초등학교는 과밀을 걱정하는 수준이라니 한숨이 나온다. 이래서는 진정한 해남의 발전은 없다. 더 이상의 인구 집중을 억제하고 14개 면에 골고루 개발과 자본의 투입이 이루어지도록 예산 집행과 정책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진 자와 그것도 지나치리만치 많이 가진 자와 없는 자로 극과 극으로 나뉘고 중산층이 소멸하는 경제구조는 병든 사회다. 군청의 온갖 홍보물뿐만 아니라 일반 언론사들의 지면들을 보라. 발간되는 거의 모든 지면에 빠지지 않고 항상 등장하는 군수 혹은 군의원들의 동정 기사들. 좀 심하지 않은가. 이들에게 집중되는 기사와 홍보가 과연 해남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군민의 작은 동정을 소소하더라도 하나라도 더 실어야 하지 않은가. 무엇이든 집중은 곧 독식을 품고, 그것은 다양성을 폐기하여 고인 물이 되어 썩게 만드는 정책으로 연결된다. 다양한 기사가, 다양한 참여가, 다양한 의견이 필요하다. 다양성이 결여된 사회는 병든 것이다. 한 언론, 다양한 생각, 다양한 인물들이 모여 사는 해남, 배타성이 사라진 해남, 집중이 해체된 아름다운 자연사회에 살고 싶은 것은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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