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희(주부)

 
 

5월만 되면, 아니 교내 집회가 있을 때마다, '5월의 노래'는 스크럼을 짜서 캠퍼스를 돌 때 부르던 단골 메뉴였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어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상상할 수 없는 가사여서 다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임진왜란도 병자호란도 아니고 나치의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도 아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백주대낮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이게 정말이야?'

1980년에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해 5월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을 거다.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에 가고, 날이 좋은 때라 소풍도 가고 체육대회도 하고 또 중간고사가 끝나면 친구들과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 먹고 누군가의 집으로 몰려가 밤새 수다도 떨었을 게다. 전라도 광주에서 그렇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상상도 못한 채.

시험 볼 때마다 상위 10%를 게시하며 대입을 향해서만 달리는 사립고등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가끔씩 이화여대를 졸업한 영어 선생님이 "영부인이면 뭐하냐? 대학졸업장도 없는데"라며 수업 시간에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영부인을 비아냥거리며 대학 진학을 독려했고, 고전 선생님은 박종환 축구감독을 영웅으로 만든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중계방송을 듣게 했을 뿐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땡전 뉴스'의 시절이었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캠퍼스에 상주하던 사복경찰들이 교문 밖으로 철수했다는 1984년이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큰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노천극장 앞 대자보에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믿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나 가혹하고 처참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사실을 알리는 것도 알려고 하는 것도 죄가 되는 때였다. 사회과학 서적을 전문으로 팔던 그래서 늘 경찰 감시의 대상이었던 학교 근처의 서점에서 은밀하게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샀다. 진실에 한 발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본을 마치지 못해 책표지가 없었던 책을 전철로 통학하며 조심히 다른 책 위에 올려놓고 읽었다.

한 장 넘기고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고 또 한 장 넘기고 주변을 살피며 읽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심장이 거세게 뛰며 미처 몰랐던 진실 앞에 분노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의심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같은 하늘 아래서 일어날 수 있었으며 감쪽같이 은폐될 수 있었단 말인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다 가릴 수는 없어 진실은 서서히 드러났다. 총칼로 광주 시민을 유린하고 사살하고 여성을 강간하고 시신을 여기저기에 유기하고 언론을 통제하여 전 국민을 바보로 만든 것도 다 사실이었다. 그러나 하늘을 가리고 있는 그들의 손바닥은 너무 두꺼워 지금 완전한 하늘을 볼 수 없지만 손가락 사이로 새는 빛이 진실을 가리고 있는 어둠을 깨리라. 5·18 민주화 항쟁 발발 39년 만에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에 광주에 직접 와서 시민 사살을 명령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2017년 독일 법원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회계원으로 활동하며 30만명의 유대인 학살을 방조한 죄로 나치 전범 오스카 그뢰닝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그의 나이는 9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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