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임(순천대 명예교수)

 
 

우리나라는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1592년-1598년)동안 왜적의 침략으로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그 때 목숨을 던져 나라를 지켜낸 대표적인 호국여성 세 분이 있다. 진주의 논개와 평양의 계월향과 해남의 '어란'이다.

진주 논개를 기리기 위해 의암사적비(義庵事蹟碑)도 건립되었고 사당인 의기사(義妓詞)에 배향하고 있으며, 평양의 계월향은 장향각(藏香閣)에 영정은 물론 의열사(義烈祠)에 배향하여 기리고 있다. 물론 이 두 분은 영정이나 추모하는 헌시와 여러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널리 알려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해남의 호국여성 '어란'은 명량대첩이라는 전쟁 자체를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반열에 오르지 못해 매우 안타깝다.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참패하고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그렇지만 겨우 12척의 배로 어떻게 승승장구하는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나라의 흥망이 갈리는 일촉즉발의 결전을 눈앞에 둔 시점에 죽음의 공포로 불안에 떨며 땅에 떨어진 수군의 사기로 기세등등한 왜적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이순신 장군은 이곳이야 말로 최대의 격전지이자 승부처라고 여겼다. 모두 죽기를 각오해야만 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호국여성 '어란'으로부터 왜적의 군사기밀과 출전계획이 전해졌다.

명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이 가장 큰 승리의 요인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전쟁을 수행하는데 적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활용하는 것은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다. 명량대첩에서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어란'이 제공한 정보가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호국여성 '어란'은 이순신 장군의 승전보를 듣고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마쳤다고 판단하고 절벽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다음 날 한 어부가 그녀의 시신을 거두어 명량해협을 바라보는 소나무 옆에 묻어주었다. 이후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여낭(여자 여(女)와 떨어질 락(落)이 여낭으로 됨)터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어란'의 묘 근처에 자그마한 당집에 '어란'을 신주(神主)로 4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을 당제를 지내고 있다. 목숨 바쳐 나라와 백성을 구한 호국여성 '어란'은 진정으로 주민들의 삶에 생생하게 자리하고 살아있다.

이 의로운 정신과 공적을 적어도 논개 수준의 격에 합당한 예우와 현창을 지방정부는 물론 국가가 적극 나서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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