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농부)

 
 

남도에서 누군가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여보세요"의 사투리다. 낮춰 부르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말을 걸 때 사용하는데, 친근하게 대화를 위해 부르는 어투다.

대화는 상대와 서로 주고받는 말이라고 하지만 나는 자기 생각을 타인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와 매우 정중하게 의견 나누며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가운데 나오는 자기 목소리라고 본다. 그래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상대가 필요하고 상호 진지한 경청이 필요한 것이다.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말하는 건 일방적 주장이고, 경청이 없는 대화는 자기 말만 강요하는 명령이다. 과거, 아니 지금도 우리는 이에 익숙한 사회에 살고 있다. 윗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리하였고 갑질이 당연시됐던 사회이니 일방적 지시와 명령이 통하는 사회였다. 나이가 많은 것도, 학교 선배인 것도, 심지어는 어떤 자리에 먼저 와있다는 것만으로도 윗사람 행세를 했다. 어떤 경우는 허접한 완장 차고 똠방 각하 노릇하며 나타나기도 했다.

자기 생각을 관철하려고 반대부터 하면서 승부를 가르듯이 치열하게 상대 이야기를 차단하는 가운데에서 지혜가 싹틀 수 없다. 승부와 상관없이 평범한 자기 말을 편하게 하는 가운데 지혜가 용솟음친다. 그것이 집단 지성이 된다. 소통이 활발한 곳에 사람이 숨 쉬며 살게 된다. 몸은 하나인데 마음은 열 군데인 것이 인간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대화를 건너뛴 자리에 무엇이 남을까. 논란이 시끄럽다고, 주제가 피곤하다고 피하는 성인들의 교활함과 모순된 욕망이 대화를 막는다. 그러나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는 법, 그래서 대화는 꼭 필요하다.

자기 목소리를 우리는 늘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기가 자기에게 대화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자기 이야기를 매우 진솔하게 하면서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 즉 상대가 나의 말을 알아줄 때, 그 대화는 매우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 결국 대화는 타인과 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나를 알아주는 상대를 빌어서 자기의 생각과 목소리를 확인하는 자리인 것이다. 대화는 나의 진실한 목소리를 찾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말이 필요 없는 오지선다형식 공부와, 경쟁에서 오로지 이겨야 산다는 강박의 세계와, 돈 없으면 사람 취급 못 받는 정글 같은 세계에서 출세하라는 과제와 함께 살다가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특히나 사회적 처지가 곤란한 경우 대부분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누구도 관심 가지고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이 자유롭다는 예술가들마저도 자기 목소리가 없는 경우가 많다.

어떤 기회가 주어져서 이야기를 시작한 평범해 보이던 사람으로부터 아주 순박하게 나오는 그 목소리에 매우 짜릿하고도 감동적인 삶의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다. '나'를 무시하고 사는 사회에 내가 너무 익숙한 탓에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나'를 마주 보는 자리이기 때문이리라. 잊혀졌던 '나'를, 잊어버리고 살았던 '나'를 마주하는 순간이리라.

대화가 없는 가족, 모임, 회사, 학교 등은 '문맹 사회'(?)의 일원이다. 부모와 대화를 하며 성장한 청소년들은 나중에 사회의 훌륭한 대화자가 되고 리더가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문명 사회'는 과학이나 사업이 중심이 아니고 대화가 활발한 인간이 중심일 때에야 도달된다.

"에-말이요, 내가 말은 좀 못해도 할 말이 있는데, 좀 들어 주실라요?", "그럽시다. 무슨 말씀인지요", "그게 말이요, 지난번 그 일 있지 않소. 그거이 내 생각해 본께 참 거시기 합디다. 서로 좀 이야기해서 잘 해 봤으면 하는데요, 잉. 우리가 뭐 머리가 엎지러진 사람들도 아닌디, 그 정신 나간 사람 모양 그러는 게 늘 걸려서 말입니다", "워메,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이런 대화가 얼마가 멋진가.

겸손하면 늘 상대의 말을 잘 경청하게 된다. 감성이 통해야 산다. 대화는 자기의 인격이다.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치유되고, 서로 존중하게 되고, 서로 공존하는 세상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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