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년과 1784년 아이슬란드에서 대규모 화산폭발이 있었다. 화산폭발로 발생한 막대한 화산재는 대기권에 머물면서 햇빛을 차단해 추위와 가뭄을 불러왔다. 이상기후로 건초가 부족해지자 가축을 도살해야 했고 가축도살은 퇴비생산감소로 이어졌다. 이는 농업생산성을 감소시켰다. 흉년에 식량부족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의 절규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권력자들에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프랑스혁명의 주원인이 부의 불균등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에 대한 착취가 심했던 것이 주원인이었다면 수년간에 걸친 기상이변은 혁명을 촉발하게 한 부요인이었다.

1977년은 우리농업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해였다. 역대 최대수확량인 4200여만석이 수확되었고 염원이던 쌀 자급을 이룬 원년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다수확 벼품종 이리327호 와 밀양39호에 연구자의 이름을 붙이도록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당시 이리 호남시험작물장과 영남시험작물장 책임자인 박노풍과 박내경의 이름을 따 '노풍(魯豊)'과'내경(來敬)' 품종을 본격적으로 보급했다.

통일벼 계통으로 도열병에 강한 품종이었지만 1978년에는 도열병균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보급한 신품종에 목도열병이 번졌고 그해 농사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품종에 이름이 붙여진 당사자들에게도 두고두고 불명예로 남게 되었다. 1979년도에는 호우에 홍수, 태풍까지 몰아치고 그 영향으로 벼꽃이 필 무렵 뜨겁고 건조한 바람으로 벼이삭이 하얗게 말라죽는 백수(白穗)현상까지 나타났다.

1979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유신독재의 심장을 겨눈 10·26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후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80년 여름은 냉해로 흉년이 들면서 엄청난 양의 쌀을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미국,일본, 호주,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이집트, 대만, 스페인, 아르헨티나, 브라질, 이탈리아 등 세계 12개국에서 수입해왔다. 당시 군부 실세들은 불량미가 포한된 막대한 쌀을 들여오면서 중간이득을 취했고 들여온 저질 쌀은 우리 농업에 두고두고 커다란 짐이 되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농업이란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3재(才)가 어울려 농업의 도를 일구어 감에 있어 세 가지 불리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편농·후농·상농 3농(三農)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 편농(便農)으로 농사의 편의성 증진과 생활을 위한 지원과 노력과 둘째, 후농(厚農) 농업을 통한 생활안정도모, 셋째, 상농(上農) 농민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주장했다.

우리나라 날씨는 4계절이 뚜렷하고 농사짓기에 좋을 듯 싶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10월 초부터 다음해 봄 4월 늦게까지도 서리가 내린다. 6개월 정도가 농사 짓기에 적기이니 작물생육에 좋은 조건이 아니고 농업 생산성도 떨어진다. 이를 피하기 위한 유리온실이나 비닐하우스 등 시설 농업은 농업의 공업화 및 의존성을 높이고 투자 비용이 과다하게 소요된다.

농가인구 및 농가수가 급감하면서 서서히 고사하고 있는 농촌에 정치권의 관심과 획기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정치권의 냉대와 무관심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간다. 그럼에도 한 해 농사 준비에 농부들 손길은 바쁘다. 올해는 날씨만이라도 순탄해서 농민들 가슴이 타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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