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참여했던 해남의 3·1운동
손태옥·손승옥 형제를 아시나요

▲ 조카와 당숙지간인 손을용 씨(왼쪽)와 손영교 씨의 모습. 해남지역 3·1운동 독립유공자인 손승옥 선생의 사진. 손승옥 선생의 형인 손태옥 선생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위쪽부터>
▲ 조카와 당숙지간인 손을용 씨(왼쪽)와 손영교 씨의 모습. 해남지역 3·1운동 독립유공자인 손승옥 선생의 사진. 손승옥 선생의 형인 손태옥 선생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위쪽부터>
 
 
 
 
▲ 독립유공자 안장길 선생의 외손녀 윤양순 씨. 안장길 선생은 지난 2014년에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위쪽부터>
▲ 독립유공자 안장길 선생의 외손녀 윤양순 씨. 안장길 선생은 지난 2014년에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위쪽부터>
 
 

<편집자주> 지난 11일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중국 상하이에서 우리나라의 임시정부가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희생하신 분들을 기리고 기억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그런가하면 해남에서는 3·1운동이 1919년 4월 11일에 본격화했다. 해남 출신 독립유공자만 61명으로 해남에 이 분들의 자녀와 손자녀 일부가 살고 있다.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 분들을 통해 그 날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해남에서의 3·1운동은 1919년 4월 학생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3·1운동이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만세시위를 계획해 6일과 11일 해남읍 장터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이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 나서 시위대열에 참여하며 참가 인원이 1000명을 넘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전국적으로도 드물게 해남에서는 3·1운동과 관련해 손태옥(당시 25세)·손승옥(당시 22세)형제가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이후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각각 태형 90대를 맞는 고초를 겪었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손태옥(1895~1934) 선생은 1919년 4월 11일 해남읍 장날을 이용해 태극기를 만들어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나눠주고 해남보통학교(지금의 해남동초) 생도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돼 태형 90대의 처벌을 받았다.

동생 손승옥(1898~1979) 선생도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태형 90대에 처해졌다. 이 때 손 씨 형제 등이 동료들과 만든 태극기가 800여개, 당목(옷감)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가 6개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손승옥 선생에 대해서는 2005년, 손태옥 선생에 대해서는 2006년에 각각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현재 해남읍에는 손태옥 선생의 손자인 손을용(73) 씨가 그리고 산이면에는 손승옥 선생의 아들인 손영교(88)씨가 살고 있다. 그러니까 손을용 씨와 손영교 씨는 조카와 당숙 사이가 된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이후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한국전쟁과 이후 좌우대립, 군사정권 시절을 거치며 혹시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쉬쉬하며 가족들에게 조차 3·1운동 참여를 제대로 알리지 않은채 운명을 달리했고 2대가 70대, 3대가 50대 후반이 된 2000년대가 돼서야 뒤늦게 국가유공자로 인정된 것이다.

손승옥 선생의 아들인 손영교 씨는 "아버지가 3·1운동 이후에 일본으로 도망가다시피 건너가면서 내가 일본에서 태어났지. 그 때 아버지가 일이 없어서 어머니랑 고물이나 박스를 주워서 팔아 생활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어. 그래서 이후 어머니 고향인 산이면으로 다시 와 생활하게 됐는데 당시 내가 국민(초등)학교 다닐 때도 한글을 알지 못하고 내 이름도 쓸 줄 몰라 고생을 많이 했고 농삿일을 돕느라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해 지금도 못 배운게 한이지."

손태옥 선생의 손자인 손을용 씨도 아버지에게서 전해들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감옥에서 옥사하셨다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이른바 나쁜 일을 하셔서 붙잡혀 감옥에서 돌아가신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10여년 전에 대통령 표창을 받고 아버님 지인으로부터 할아버지 얘기를 전해들으면서 할아버지가 3·1운동에 참여하신 분인 걸 알았다고 한다.

손을용 씨는 "할아버지가 3·1운동 하시면서 체포돼 태형을 받았는데 그 때는 약이나 병원이 제대로 없다보니 그 후유증으로 엄청 고생하셨다고 들었어. 또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 부모님이 농사지으면서 나 포함해 6남매를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지. 어머니는 93세로 아직 살아계시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되신 것을 못보고 돌아가셨지. 아버님 살아계실 때 되셨으면 덜 고생하고 아버지도 마을잔치 열며 기뻐하셨을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손을용 씨는 오는 5월 11일이 아버지 기일로 모든 가족들이 해남에 모이게 되는데 이제는 자랑스런 나의 할아버지 얘기를 다시 한번 가족들과 나누겠다고 말했다.

3·1운동 피살자 안장길 선생

3·1운동을 하다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진 유관순 열사를 우리는 3·1운동 당시 피살당한 애국자라고 부른다. 국가기록원이 이승만 정부 때 전국적인 조사를 통해 작성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를 바탕으로 2013년에 발표한 3·1운동 피살자는 630명으로 이가운데 해남 출신은 안장길 선생과 김명곤 선생 등 2명이다.

특히 안장길(당시 32세) 선생은 만세운동을 벌인뒤 한달 후에 후유증으로 숨졌다. 그러나 그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해는 2013년 명부가 발표된 뒤 지난 2014년의 일이었다. 사망 후 무려 95년 만의 일이다.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안장길 선생(1888~1919.5.21.)은 1919년 4월 11일 해남시장 홍교 부근에서 군중들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돼 같은 달 17일 태형 60대를 받고 태형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태형을 받고 한달 뒤에 숨진 것으로 태형으로 인한 장독에 의해 숨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고인에게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현재 산이면에는 안장길 선생의 외손녀인 윤양순(59) 씨가 살고 있다.

15년 전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실 때까지 함께 생활했지만 어머니가 살아생전에 외할아버지 얘기를 전혀 해주지 않아 2014년 건국훈장을 받고 나서야 외할아버지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안장길 선생의 경우 자녀와 손자들이 사망하거나 없어 외손자들이 건국훈장을 받게 됐다. 윤양순 씨는 자신이 17살 때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어 평생 어머니가 농사를 지으면서 두 딸을 키우느라 고생하셨는데 건국훈장을 받고 나서 어머니의 모습이 더욱 생각났다고 말한다.

윤양순 씨는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외할아버지와 행복하게 재회하시라고 어머니 묘소 옆에 외할아버지 비석을 함께 세워 놓았다"며 "앞으로는 이렇게 가슴 아픈 역사가 없었으면 하지만 자랑스런 역사이기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은 분들이 이런 역사를 알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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