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반민특위활동이 잘 됐어야 했지만 (반민특위가) 결국 국론분열을 가져왔다"는 발언을 했다.

대통령에 대한 날선 비판이야 야당원내대표니까 그럴수도 있겠다 이해할 수 있지만 반민특위에 대해서 이처럼 저급하고 저열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다니 놀랄일이다.

해방 공간에 미군 24사단이 진주하면서 맥아더는 "공무원과 고용인 및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그 통상적인 업무를 계속 수행하라"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미군정은 점령지 통치를 위해 "사람이 없어 경험이 있는 사람을 등용할 수 밖에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일제경찰 출신 80% 이상을 다시 현직에 복귀시켰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9월 3일 내걸은 당면정책에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賣國賊)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엄중히 처벌할 것임을 선언했지만 미군정의 한국역사에 대한 몰이해, 민족감정을 도외시한 상반된 정책은 불행한 역사의 씨앗이 되었다.

1945년 12월 12일 과도입법의회는 "우리의 운명을 우리 손으로 자정(自定)하는데 매진하겠다"고 공표하고 1948년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모리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지만 미군정은 첫 번째 개인적 보복이 우려됨, 둘째 모든 민중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함, 셋째 조선전국에 동일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법안서명을 거부함으로써 친일세력들은 오히려 기세가 등등해졌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제헌국회는 헌법101조에 단기4278년(1945)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 처벌을 명시하고 독립운동가인 제헌의원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했다.

박흥식 화신백화점 사장을 비롯해 최린, 김연수,이광수와 악질경찰 노덕술 등이 조사대상으로 특경대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자들 중 최린처럼 반성의 모습을 보인 사람은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은 반민특위에 정면도전 하면서 친일행적을 부인했다. 친일세력이 반공 프레임을 내걸고 전면에 나서면서 이승만정권은 내무차관을 시켜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특경대를 빨갱이로 몰아 해산하고 반민특위 간부에 대한 암살기도 및 국회프락치 사건을 통해 반민특위 무력화를 시도했다.

보수 친일파의 반격으로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 후 20일 후인 6월 26일 김구선생이 암살됨으로써 분단극복과 친일세력청산 시도는 무력화되고 결과적으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다. 그 결과 친일파는 이 땅에 더욱 굳건히 뿌리를 내렸고 대를이어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이에 비하면 프랑스는 전쟁 중이던 1944년에 나치협력자 만 여명을 즉결 처형한 레지스탕스에 의한 비공식적 숙청에 이어 드골은 전 후시민법정을 설치하여 나치협력자를 철저히 심판했다.

우리 힘으로 이뤄내지 못한 독립은 결국 민족분단과 전쟁, 그리고 반목과 갈등의 역사로 점철됐지만 이를 극복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은 민족사 최대과업이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우리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남아있는 '미친데기 역사관'을 뿌리 뽑고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일이 선결과제라는 사실을 나경원 '토왜'성 '자발적 커밍아웃'은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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