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일제강점기인 1945년 3월과 4월 제주도로 강제로 끌려가 군사시설인 동굴 등을 파는 일에 투입됐다가 해방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선박화재로 118명이 바다에 집단 수몰된 옥매광산 광부 수몰사건. 사건이 발생한지 70년이 넘었지만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92살 김백운 옹을 통해 당시 상황을 들어보고 유족회 등에서 추진하고 있는 소송 진행상황도 알아본다.

▲ 해남신문과 해남군, SBS가 함께 진행한 인터뷰에서 옥매광산 광부 수몰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김백운 옹이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 해남신문과 해남군, SBS가 함께 진행한 인터뷰에서 옥매광산 광부 수몰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김백운 옹이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 옥매광산희생자 유족회 박철희 회장이 관련 소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옥매광산희생자 유족회 박철희 회장이 관련 소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느덧 90대가 된 생존자의 외침
"강제로 부려먹었으면 보상해줘야지"

현재 목포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92세의 김백운 옹. 얼굴에는 세월의 무게와 그 때의 아픔이 짓누르며 주름살이 가득했지만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즈그(일본)가 전쟁을 벌여가지고 한국사람을 부려먹었으면 댓가를 치러줘야지. 우리나라도 말로만 보상해준다 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나서고 해야지. 아무것도 안돼있어"

김백운 옹은 1945년 8월 발생한 옥매광산 광부들 수몰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다. 이 사건으로 118명이 완도 청산도 앞바다에서 집단 수몰됐고 당시 생존한 100여명도 모두 숨지고 김백운 옹만 유일하게 아직 생존해 있다.

제주도로 어떻게 끌려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 묻자 김백운 옹은 "원래 옥매광산에 취직을 한 것인데 어느 날 아침 회사에서 광장으로 전부 모이라고 해서 나갔더니 이미 무장 경찰과 헌병한테 포위가 돼서 모두 끌려갔지. 제주도에서 강제노역하면서 배가 고팠지만 밥은 쌀과 보리는 하나도 없고 모두 수수에다가 반찬은 풀에 소금물 탄 것이 전부고 짐승 취급을 당했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정부 요청으로 아사다화학공업 주식회사에서 옥매광산 광부들을 이른바 공출해 제주도에서 군사시설인 굴 등을 파는 일로 강제노역을 시킨 것이다.

여러차례에 걸쳐 200명이 넘게 끌려갔는데 모두 광부이고 김백운 옹 등 3명은 선반공 견습생 등 기술자여서 그나마 대우를 받았다. 광부들은 막사도 없이 비가와도 나뭇잎을 가리고 잤으며 옷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알몸으로 굴 파는 작업을 하다보니 온 몸이 시커멓게 됐고 일본군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등 가혹행위로 인한 피해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개월간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해방 소식이 전해오고 광부 등 230여명은 8월 20일 기쁜 마음으로 고향으로 향하는 배에 탔지만 결국 배에서 원인 모를 불이 났고 이 과정에서 118명이 구출되지 못해 수장됐다. 배에서 불이 나고 구조된 경위를 물었다.

김백운 옹은 "배가 가다가 세 번 고장났고 이후 갑자기 불이 나 모두 살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지. 많은 사람들이 널빤지만 잡고 몇시간을 버텼는데 일본 군함이 다가왔어. 우리 배에 일본사람 5명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그중 한명과 나를 포함해 광부 2명 등 모두 3명이 가장 먼저 구출됐어. 일본군들이 구출된 일본 사람에게 상황설명을 듣고 망원경으로 다른 일본사람이 살아 있는지 바다를 살피더니 바다에 구출해야 할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는데도 구해주지 않고 현장을 떠나버렸어. 그리고 구출된 우리들도 자기들이 진해로 가는데 시간이 없다며 육지가 아닌 청산도에 내려주고 가버렸지. 그 때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겠어"

당시 배도 아사다 측이 구했고 배에 탔던 일본사람들은 모두 아사다 간부급으로 전쟁이 끝나자 광부들을 고향에 내려주고 자기들은 일본으로 돌아갈 상황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일부에서는 이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일부러 불을 내 우리광부들을 수장시킨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바다에 빠진 사람들 중에 100여명은 일본 군함이나 이후 청산도 마을 사람들에 의해 구출됐고 일부는 직접 섬으로 헤엄쳐 가 살아남았지만 118명은 그대로 바다에서 숨졌다. 김백운 옹을 비롯한 탈출자들은 이후 청산도 사람들이 내 준 배를 타고 구사일생으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당시 피해 후유증으로 상당수가 일찍 숨졌고 피해자 가족들도 타지로 떠나 흩어져 버렸다.

김백운 옹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으며 한 부락에서 한날 30명을 함께 제사지내는 곳이 그래서 생기게 됐다"며 "강제동원된 사람 보상해준다고 말로만 대여섯번 들은 것 같은데 지금까지 보상된 것 하나도 없고 말로만 하지, 지금까지 된 게 뭐가 있냐"고 하소연했다.

자신의 말을 듣기 위해 찾아 온 취재진에게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다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김백운 옹. 살아 생전에 꼭 이 사건에 대한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고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뤄지기를 모두가 바랄 뿐이다.

지난 2005년 정부에서 실시한 일제강점기 피해조사를 통해 이 사건과 관련한 희생자는 모두 84명으로 이들만 국가기록원에 등재됐다. 하지만 이는 생존자와 유족의 신고만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유족들이 이후 각종 증언과 자료에 따라 직접 발품을 팔아 조사한 끝에 이 사건과 관련해 바다에서 수몰된 희생자 118명을 찾아냈지만 현재 이름이 확인된 사람은 73명 뿐이다. 지난 2017년 군민과 각 기관단체의 모금운동으로 황산면 삼호리 선착장에 희생자 중 70명(건립이후 3명 추가 확인)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가 건립됐다.

국외 강제동원 피해자와 관련해 정부는 지난 2007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했고 해마다 의료지원금도 지급하고 있다. 또 일본 전범기업의 책임이나 보상을 규정한 대법원 판결도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옥매광산 수몰사건처럼 국내 강제동원 사건은 자료가 부족하고 1965년 한일협정에서 우리 정부가 스스로 국내 강제동원 사례 자체가 없다며 거론조차 하지 않아 보상이나 지원이 전무한 실정이다.

똑같은 강제동원인데 왜 구분하나
보상과 관련 소송 진행, 결과 관심

똑같은 강제동원 피해자인데도 국외와 국내가 구분되며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보상이 이뤄지지 않자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직접 나서고 있다. 옥매광산 광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 끌려간 것이 아닌 우리나라 내에서 강제 노역을 한 피해자들이 발생한 곳은 군산과 부산, 거창, 서울 등으로 피해자가 3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5년 3월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돼 경기도 시흥 육군훈련소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한 올해 96세의 김영환 옹(군산)은 우리나라를 상대로 10여년째 보상금 지급과 관련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그동안 규정이 없어 법원의 판단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관련 재판들이 기각돼왔으나 10년간의 외로운 싸움은 결국 작은 결실을 맺었다. 지난해 11월 법원에서 본안사건으로 인정돼 정식 재판이 진행될 수 있게 됐다.

▲ 지난 2017년에 건립된 옥매광산 광부 수몰사건 희생자 추모비. 군민과 관련 기관단체의 모금운동을 통해 건립됐다.
▲ 지난 2017년에 건립된 옥매광산 광부 수몰사건 희생자 추모비. 군민과 관련 기관단체의 모금운동을 통해 건립됐다.

'일제강점기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지급청구' 소송으로 원고는 김영환 옹, 피고는 우리나라 외교부 장관으로 돼 있다. 오는 3월 21일 서울행정법원에서 첫 공판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옥매광산희생자 유족회 박철희 회장은 최근 해남을 비롯한 5개 지역 국내 동원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자필서명을 받아 법원에 조만간 진정서를 낼 예정이다. 현재 원고가 김영환 옹 혼자로 돼 있는데 우선 자필서명을 받은 80여명 모두를 원고로 인정해 사건을 병합해 재판을 해달라는 내용이다. 80여명 중에는 옥매광산 사건 희생자들이 60여명에 달한다.

진정서에는 '일제치하에서 강제동원으로 끌려가면서 국내, 국외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고 동원중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망자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며 일제강점하 국내동원 피해자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까?'라는 내용 등이 담겨있다.

똑같은 피해자인데 차별을 받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며 돈 문제를 떠나 명예를 회복하는 차원에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유족들은 말하고 있다.

박철희 회장은 "유족들이 제사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고 추모조형물도 없었는데 그동안 지역사회에서 큰 관심을 가져주고 모금운동까지 실시해 지금은 추모비가 건립됐고 전국적인 관심까지 끌어모은데 대해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 "관련 소송에도 많은 관심과 응원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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