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만 덩그러니, 맞은편 축사도
기념 공간, 기념 콘텐츠도 부족

▲ 지강 선생의 순국비 바로 뒤쪽에 축사가 자리하고 있다.
▲ 지강 선생의 순국비 바로 뒤쪽에 축사가 자리하고 있다.
▲ 지강 선생 전시관은 흉상과 영상시설, 관련 그림과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 지강 선생 전시관은 흉상과 영상시설, 관련 그림과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 기미독립선언기념비, 일본식 충혼탑을 모방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 기미독립선언기념비, 일본식 충혼탑을 모방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 대흥사에 있는 백설당 현판. 친일파 김성근이 쓴 작품이다.
▲ 대흥사에 있는 백설당 현판. 친일파 김성근이 쓴 작품이다.

<편집자주> 대한민국의 독립을 대대적으로 선언하고 남녀노소 구분없이 전국적으로 펼쳐진 비폭력 저항으로 평가되는 3·1운동 정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 역사적 사건에 해남이 있었고 해남 출신 독립운동가 지강 양한묵 선생이 있었다. 그러나 양한묵 선생 기념사업은 3·1운동 100주년에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고 해남 곳곳에는 친일잔재 논란이 여전하다. 100주년을 맞아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해본다.

 

지난 25일. 지강 양한묵 선생의 순국비가 자리하고 있고 새로 복원된 그의 생가와 전시관이 마련된 옥천면 영신마을.

3·1절 100주년 관련 행사와 방문객들을 위해 이날부터 일주일동안 문화재해설사가 배치됐고 그동안 자물쇠가 채워졌던 전시관과 생가가 임시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지강 양한묵 선생의 순국비 너머로 1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맞은편에 자리한 축사. 순국비에 다가갈수록 축사에서 나오는 냄새도 더 가까워진다. 기념공간이나 추모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다는 의구심과 함께 여름에는 축사 냄새가 더 심하겠는데 하는 걱정이 앞선다.

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전시관에는 양한묵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안내판과 영상 시설, 1962년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문, 2008년 보훈청에서 지정한 이달의 인물 선정 포스터, 민족대표 33인이 모여있는 그림과 독립선언서 사본, 양한묵 선생의 흉상, 선생의 인장(도장) 사진, 선생이 돌아가신 서대문형무소를 이미지한 사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모든 게 다 사진과 그림 뿐으로 선생의 흔적이 담긴 유품이나 유물,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료는 물론이고 천도교를 대표한 인물이지만 천도교와 연계된 저술서나 관련 자료 등 실물도 없고 지강 선생 전시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색있는 내용물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번에는 복원된 생가를 들여다봤다. 흔한 장돗대나 우물도 눈에 띄지 않더니 생가 안에도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책상에 책이 놓여있을 뿐. 주민 증언으로 생가를 복원했다고 하나 원래 5칸이었는데 실제 살던 당시를 그대로 모형화하지 못해 본채와 별채로 나뉘어져 있고 19세까지 생가에서 그리고 마을에서 어떻게 지냈고 어떤 에피소드와 추억이 있는지, 관련된 모형물이나 마을에 남아있는 역사적 장소와도 스토리가 입혀지지 않은채 건물만 놓여 있는 형태다. 사업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됐는데 3·1절 100주년에 맞춰 정식 개관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듯하다.

해남군이 생가터 복원과 전시관 건립을 위해 쓴 예산은 국비와 군비를 합쳐 모두 12억원이다.

스토리텔링, 공원화 등 보완 필요

양한묵 선생은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한 호남사람으로 천도교 대표로 참여했다. 이곳 옥천면 영신마을에서 태어나 19세까지 지내다 나주로 분가했고 화순에서 생활하며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천도교 교리 연구와 애국 계몽운동, 청년 교육에 앞장섰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써왔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에 참여해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대문감옥에 수감됐고 90여일만에 모진고문 끝에 향년 58세의 나이로 형무소에서 인생을 마감했다. 화순에는 선생의 묘지와 추모비가 있고 해남에는 순국비와 함께 생가터 복원이 이뤄졌다.

해남군은 당초 지난 2010년 기념사업 기본계획 용역을 마련해 생가복원 사업을 중심으로 선생이 어린 시절 공부했던 서당과 선조를 모신 사당 등을 연계해 영신마을 전체를 독립운동 역사체험마을 조성사업으로 추진해왔다. 그러나 부지매입에 시간이 걸렸고 유물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사업기간이 늘어지고 내용도 점점 축소되며 지금의 모습이 되버렸다.

해남군은 일본 경찰이 선생의 유물을 몰수해 모두 불살라 버렸고 유일한 유품은 인장 하나인데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는데다 미국 등에 있는 유족과 천도교쪽에 관련 유물이나 자료를 요청했지만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 어려움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축사 문제도 그렇다. 사업 전에 이미 축사가 자리하고 있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그렇더라도 보완이 필요했다.

해남군 관계자는 "당초 축사가 보이지 않게 순국비 바로 뒤로 병풍처럼 나무를 심어서 가릴 계획이었지만 예산이 부족해 그렇게 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보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양한묵 선생에 대한 의미부여와 홍보도 부족했다. 추모비가 있는 화순군은 해마다 추모비에서 3·1운동 기념식이나 시무식 행사를 열며 의미를 부여하고 선생과 화순과의 관계를 알려왔지만 정작 선생의 출생지인 해남군은 100주년을 맞아 생가와 전시관의 정식개관도 못하고 임시개관에 머물고 있다.

사업 전에 역사적 고증과 세밀한 준비, 담을 콘텐츠, 활용 방안 등에 대한 해법이 필요했지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지며 어색한 모양이 됐고 역사체험마을 조성사업의 큰 그림도 여전히 미지수다.

이에 따라 양한묵 선생에만 머물지 말고 3·1운동과 해남에 대한 의미 부여와 함께 각 학교, 단체와 연계한 역사교육의 장, 그리고 생가터에 조성된 무궁화 동산과 여기에 문학과 예술공연을 접목한 마을축제화, 생가터와 전시관에 대한 스토리텔링화와 추가적인 콘텐츠 보완 등을 통해 좀 더 활기있는 기념공간으로의 변신이 시급한 실정이다.

해남의 친일잔재, 역사적 고찰 필요

구교리 서림공원 내 단군전 앞에 자리한 기미독립선언기념비, 높이만 4m에 6단의 높다란 기단 위에 세워진 사각 기둥 형태의 기념비다. 앞면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오세창 선생의 글씨로 기미독립선언기념비라고 새겨져 있는데 1946년 3월 1일에 건립됐고 2002년 11월에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해남에서는 1919년 4월 6일 해남공립보통학교(지금의 해남동초) 학생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청년과 군민 등이 합세하며 6일과 11일 해남읍 장날을 맞아 1000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광주전남의 친일 잔재 조사를 그동안 해온 광주교육대학교 김덕진 교수는 해남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우리 전통 비석은 사각형 위에 모자를 씌우거나 동그랗게 처리하는데 일본식 충혼탑은 윗부분이 사각뿔 모양이며 특히 끝이 날카로운 묘지석은 전쟁으로 사망한 병사의 묘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시설을 만들며 일본식을 모방해 세운 것은 큰 잘못이기 때문에 철저한 검증을 통해 철거나 보완 등 정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천년고찰 대흥사에 있는 백설당. 스님들이 수행을 쌓는 선방이던 곳인데 '백설당' 현판은 조선말기 이조판서, 예조참판, 전라도관찰사와 대한제국수립 후 법무대신, 탁지부대신을 지냈고 서예가인 해사 김성근이 쓴 것이다. 해탈문 입구에 있는 '두륜산 대흥사', 지장보살을 모시는 '명부전' 현판 글씨도 그의 작품이다. 그런데 김성근은 1910년 한일합방당시 이완용 등과 함께 대표적 친일파로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왕에게서 은사금 5만엔(현재 가치 10억원)과 함께 자작직위를 받은 인물이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에도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명돼 있다. 이같은 인물이 쓴 현판이 대흥사에 걸려 있는 것이다.

대흥사 성보박물관 측은 "좋은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고 나쁜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다. 나쁜 역사라고 해서 흔적을 모두 지울 수 없는 것처럼 그 나름대로의 역사로 인정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전히 상당수 군민이나 방문객들은 이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고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있다. 역사적 의미를 어디에 둘 것인지 많은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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