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농부)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오래 그리고 멀리 가지 못한다. 여럿이 함께 천천히 가야 멀리 갈 수 있다. 그런 가운데 티격태격 일도 벌어지고, 이리저리 사람도 만나면서 문화도 만들어지고 '공동체'(共同體)가 만들어진다.

농사는 땅을 파는 것만이 아니다. 땅을 존중하지 않으면 소출이 작고, 내 먹거리가 병든다. 이웃을 배려하지 않으면 수로가 막히거나 농로가 막혀서 농사를 망친다. 농촌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성장한다. 그 가운데서 인심이 난다. 인심은 사람의 마음이니 동물의 마음이 아니다. 먹거리가 풍요로워서 인심이 좋아지는 게 아니다. 못 사는 이가 콩 한 쪽을 나누는 이유는 서로를 배려해서이다. 잘 사는 이가 콩을 나누기는커녕 남의 콩까지 가져가는 이유는 돈에 절임 되어서 그렇다. 돈이 최고이니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없는 가운데 나누는, 정말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최고이듯, 서로 함께 하는 세상이 살맛 나는 곳, 그곳이 바로 농사 짓는 곳이다.

자식 농사라 하지, 자식 장사라 하지 않는다. 자식을 소중하게 키우는 일, 그것은 자식을 존중하고 배려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좀 더 남보다 빨리 크라고 사설 입시 학원 보내고, 강제로 집안 환경이 좀 부족한 아이들과 못 만나게 제초제 뿌리고,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하지 못하게 농약 뿌린 농사가 제대로 된 농사이겠는가. 언제인가는 그 땅이 병 들고 농사가 망한다. 천하(天下)는 냉하고 습하고 더운데, 혼자만 잘사는 세상에 살라고 자식을 키워내어 어디로 보낼 것인가. 과한 농약은 땅을 죽이듯이 과한 이기주의와 속박은 자식을 망친다. 인간은 공존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땅과 공존하고 사람들과 공존하며 사는 것이다. 공명조(共命鳥)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농촌의 99%였던 소작농이 진짜 농부다. 땅을 많이 가지고 소작료로 사는 이는 농부가 아니다. 농부가 천하의 근본인 이유는 땅을 파되 자연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농사를 삶의 근간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작농의 자식이었음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가난은 타인과 비교할 때 발생 되는 재물 비교급이다. 인격의 급이 아니다. 서로 어울려서 잘 살았던 마을 공동체에서 어느 누가 가난하다고 손가락질했던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어울려 잘 살았었다. 그래서 농사는 존중과 배려이고 공동체의 시작이다.

소작농의 아들이었으나 이제 이만큼 떵떵거리고 잘 산다고 도시 생활을 자랑한다면 이는 농사에 손가락질함이다. 자기의 눈높이 수준을 낮추는 마음, 같이 잘 살고 있다고 수줍어하는 인간의 마음, 그것이 농부의 마음이다. 같이 사는 세상이 천하(天下)이지 왕이 혼자 지배하는 세상은 천하(天下)가 아니다. 왕국(王國)은 멸망해도, 인간이 사는 세상, 농부가 사는 세상인 천하(天下)는 멸망하는 법이 없다. 돈은 없어도 다시 생기지만 이웃은 잃으면 다시 생기지 않는다. 농부의 아들이 존중받는 세상, 진심을 다하여 땅을 파고 씨를 뿌려 거두는 흙의 공동체가 바로 따뜻한 인간들의 천하(天下)다.

2019년도는 돼지띠의 해이다. 돈에 절임하는 대량사육의 '황금돼지'의 해라 부르지 말고, 해남은 농사가 근본인 땅답게 조그마한 울안에 키우는 '흙돼지'의 해라 부르면 좋겠다. 황금(黃金)이 들어옴을 복(福)이라 하지 말고, 흙의 세상을 가꾸는 농사가 건강함을 진짜 복(福)이라고 하면 좋겠다. 흙이 건강하면 우리의 미래가 건강해진다. 땅끝의 건강한 흙으로 마지막 희망을 천하(天下)에 전파하면 어떨까. 무언가 같이하는 농사의 즐거움을 말이다.

농사를 짓자. 제대로 된 농사를 각자 삶의 터전에서 열정적으로 짓자. 그리고 농사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자. 꿀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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