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여명 근무 ``제2의 목포``라 불린 황산 성산리

일제가 만들어 놓은 공장의 주추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황산면 성산리로 향했다. 아직도 전쟁터처럼 온산이 광물채취로 벌집을 쑤셔 놓은 듯한 성산리 광산을 지나 해안가에 다다랐다.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지름이 15m, 높이가 10여m에 달하는 거대한 원형통 3개와 산 정상까지 두툼하게 쌓아 올린 시멘트 벽과 파괴된 구조물들이 이곳에 큰 공장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었다. 그래도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이곳은 인근 옥동의 옥매광산이 폭격으로 대부분 유실된 데 비해 광산과 공장의 주추가 잘 남아 있었다. 이곳 성산광산은 1933년 공식적으로 개발됐으며 이곳에서 명반석을 채취해 알미늄을 생산, 일본 나고야에 있던 비행기 제조공장으로 전량 반출했다. 이용흠 성산광산 소장에 따르면 “그 당시 이곳은 전기와 전화가 개통됐고 광산인부 1500명, 공장인부 1500명 등 3000여명이 근무했던 곳”으로 사람들은 이곳을 ‘제2의 목포’라 불렀다고 한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수많은 한국사람들이 광부로 이곳에서 노동에 시달렸으며 성산은 온통 생채기만 가득 남긴 산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곳에서 생산한 알미늄으로 만든 비행기가 일제의 침략전쟁에 이용돼 우리 민족과 동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원한을 갖게 했을 것이다. 아직도 해남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의 흔적들이 커 보이는 것은 정리되지 않은 역사 탓이 아닐까. 1941년 해방을 몇 해 앞두고 성산과 인근 옥매광산에서 명반석 생산이 중단됨에 따라 일제는 이곳에 있던 알미늄 제련 시설을 일본으로 옮겨가 현재는 그 구조물만 남아있다. 아직도 이 땅에서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일제의 잔재는 언젠가 청산하고 넘어가야 할 과제라는 것을 다시금 절감케 한다. 지금에 와서, 세계화의 물결이 뜨거운 이 시점에서 일제를 청산하자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당시 인근 옥동마을에서는 옥매광산에서 일하던 광부 220명이 강제로 제주도로 끌려갔다. 그리고 해방과 함께 돌아온 이들은 100여명뿐, 나머지 사람들은 제주도에서 해남으로 향하던 배가 연료부족으로 좌초돼 수장돼 버렸다. 적은 배에 많은 사람을 실었고 불량한 연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고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해서 죽어간 사람들, 어쩌면 친일은 해남광부들의 죽음이 제국주의의 침략을 위해서 당연하다고 여기고 얼마든지 죽어야 한다고 하는데서 청산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친일의 청산문제가 세계화 속에서 편협한 민족주의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여겨지는 것보다도 그 행위자체가 인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또한 일본의 협력자들이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고 여러 가지 반칙으로 얻어낸 재산을 그 후손들에게 개인의 사유재산권이라고 보장해 주는 이 시대의 답답함 때문일 것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동과 성실함 대신 반칙을 꿈꾸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 성산에 남겨진 일제의 흔적은 오히려 보존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개운치 않은 일제의 잔재 앞에서 씁쓸히 뒤돌아 서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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