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안(한국해양수산개발원 연구위원)

 
 

예부터 역은 먼 길의 출발지였다. 아울러 역에 사람이 모여, 주변에 자연스럽게 장터가 자리할 수 있었다. 역과 주변에 사람과 물자가 모여 소식을 나누기도 하며 거래하며 사람을 만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근대국가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 버스, 비행기 등은 사람과 화물의 대대적 이동을 촉진하며 먼 곳을 내 집과 일일 생활권으로 묶고 있다.

목포역은 나에게 이러한 교통 기능 외에 특별한 기억을 일으킨다. 1960년 초이다.

서너 살 적이다. 나는 돌아가신 부친과 목포 역에서 증기 기관차로 연결된 열차를 타고 서울을 갔다. 기차가 굴을 지나고 들과 강을 가로지르면, 나는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 했었다. 서울에서는 당시로는 유용했던 전차도 타고 남산 케이블 카에 올랐던 추억이 있다. 증기 기관차가 건널목을 지나면 칙칙폭폭 소리를 내면서 하얀 증기를 품어대곤 했다.

1970년대 일이다. 모두가 돈 만들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우리 집은 유달산 북동쪽 기슭인 죽교동에 있었다. 홀어머니가 집 한 켠에 어렵게 공간을 마련하여 돼지를 키워 돈을 마련하곤 했다.

목포 인근인 무안군 일로면과 삼향면 등에서 농민들이 새끼 돼지를 팔러 목포 역으로 왔다. 어머니와 나는 튼실하고 귀여운 새끼 돼지를 골라 집에서 길러 팔곤 했다. 돼지파는 장터는 돼지 외에 집에서 전통방식으로 고아 만든 엿과 계절 농산물이 있어 흥미를 자극하곤 했다. 그 장터는 호남선 선로가 끝나는 인근 담벼락에 형성되었으며, 멜라콩 다리로 이어졌다. 멜라콩 다리는 일설에 의하면 멜라콩이라는 별명을 가진 철도 잡부가 사비로 건설하였다.

멜라콩 다리 인근에는 친구 A 의 집이 있었다. 꿈과 이상이 넘치는 녀석이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 대 초까지 외지에서 대학을 다녔던 나는 목포역에 도착하면 그 친구를 만나, 막걸리를 나누며 풋풋한 사랑이야기와 시절 평론을 안주로 삼았었다.

그 친구의 집을 경계로 목포 역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고 목포 항과 관련된 가게들과 시설들이 시작되었다. 건어물 가게, 홍어 가게, 김 가게 등이 즐비하였다.

A 의 집은 일제 강점기 목포의 대표적 번화가인 오거리와 3분 정도 거리로 주변에 청년들에게 인가 높은 막걸리 집들이 모여 있었다. 지금도 궁금하지만 A 가 인문계 고교 졸업 후 어느 진로를 택했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1980년 5·18 당시였다. 나는 시민군으로 도청에서 지휘부 지시로 광주 광천동인근 삼익아파트 옥상에서 계엄군의 진입을 저지하도록 배치를 받았다. 그곳에는 이미 자발적으로 조직된 다른 시민군들이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시민군 내 의심과 갈등(당시 계엄군과 보안사 요원들의 잠복과 위장활동)이 증폭되어 총까지 발사되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어 나는 광천동 자취방으로 가야만 했다. 그곳에는 애타게 나를 찾아 올라오신 어머니가 계셨다. 나는 다음 날 어머니 손에 이끌려 외진 길을 묻고 물어 걷고 걸어서 인심 좋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무안읍에서 외삼촌과 만나 목포에 이르렀다. 당시 목포 시민들은 목포역에서 집회를 한 후 시내를 행진하고 하였다. 고향 기차역에 대한 기억 들이다.

2018년 겨울의 초입이다. 노을 깔린 시가지 너머 유달산 바위들이 옹골찬 기상을 뽐내며 고향 떠난 자를 반긴다. 그렇지만 아버지도, 역 담벼락 시장도, 친구도 사라진 목포역 앞은 이미 상권을 하당지구와 무안군 남악지구에 빼앗겨 오가는 행인마져 드물고 사무실 임대광고가 나붙은 거리풍경은 스산하기만 하다.

해남에도 기차역이 들어선다. 기차역을 단지 정거장이 아닌 교통거점으로 살려나가고 기차역을 매개로 지역을 활성화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기차역은 우리에게 일상이면서 특별하다. 이제 해남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