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평면 남창리 280번지는 내가 태어난 곳이다. 예전 남창교회 자리로 아버님이 1960년대 10여년 간 북평면 남창교회에 시무하셨기에 그 연유로 태어난 곳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보다 3년 먼저 광주로 전학을 가게 되어 남창을 떠났기에 고향에 대해서는 가물거리는 단편적 기억 밖에 없고 고향 친구도 없다.

해남을 떠나서 광주로 옮겨간 후 70년대에 부친께서는 광주 구 시청 자리에서 목회하시면서 도시산업선교 활동으로 폐품은행을 운영하셨다. '폐품은행'은 일용노동자들이 빈병을 모아오면 그것을 이문을 남기지 않는 가격 그대로 사드리고 그분들에게 점심식사를 드리면서 선교활동도 하는 곳이었다.

매번 지출은 발생하고 모인 병은 일정 정도 수량이 되어야 현금으로 교환되기 때문에 항상 집에는 돈이 별로 없었고 중학교 때 반에서 납부금을 가장 늦게 내는 아이였다. 종례시간에 선생님께 언제까지 내겠다고 친구들 앞에서 말해야 하는 게 가장 힘들었던 일이었던 것 같다.

1974년 10월 24일 중학교 3학년 일이다. 당시 10월 24일은 'UN데이'로 법정공휴일이었다. 1950년부터 1975년까지 법정공휴일이었지만, 1976년에 북한이 유엔 산하기구인 유네스코 상주대표부가 개설되면서 박정희 정권이 항의 표시로 국가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그날 아버지께서 새벽기도를 다녀오신 후 3개의 현수막을 만드셨다. 세가지다 문구가 기억나진 않지만 그 중 하나인 "올라가는 물가고에 서민층은 울고 있다" 것은 기억난다.

따라 나서라는 부친의 엄명에 어머니를 제외한 우리 6남매는 눈물바람을 하면서 따라나섰다. 아버님이 앞장서고 소리치고 우리는 2명씩 현수막을 들고 충장로 1가부터 5가까지 행진했었다. 긴급조치가 발동된 시대라 결국 경찰에 잡혀가서 우리는 학생이라 훈방되고 부친께선 얼마간 뒤에 풀려나셨다.

다음날 학교를 가야 하는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일을 알고 수군거리는 것 같아 학교에 가기가 싫었었다. 학교에 가니 친구들은 모르고 담임 선생님이 불러서 여러가지를 물어보셨다. 우리 때부터 광주 고교진학이 무시험 추첨제였는데 그 학교에 가면 장학금을 준다며 시험을 보는 공업계 고교 진학을 권유하셨다. 부친께 선생님이 가정형편도 그러니 공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라고 한다고 전했더니 "21세기는 1인 1기의 시대"라며 적극 권유를 하셨다.

결국 UN데이 그 일은 인문계가 아닌 공업계 고등학교에 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적성에는 맞지 않은 부분도 있었고 쉬는 날은 '폐품은행'에서 각종 병 정리를 해야 하는 '병(甁)든 청소년기'를 보냈다.

부친이 돌아가신지 올해 10월이 10주기이다. 파란 가을하늘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더욱 생각나게 한다. 항상 시대를 앞서서 생각하고 행동하셨기에 현실에서 보면 합리적이지 않게 보이는 측면도 있었지만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옹호하는 일에 힘쓰셨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인지, 형제들의 아버지에 대한 투사(投射)인지 모르겠지만 누님이나 동생들이 모이면 나에게 "나이 들어 가면서 하는게 갈수록 아버지를 닮아간다"고 한다. 부모님의 사랑에 늘 감사하면서 지금은 잊혀가는 UN데이의 아버지와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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