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삐딴 리'는 전광용 작가가 1962년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캡틴(Caption)의 러시아어 표기인 '까삐딴'은 '우두머리', '최고'의 의미로 주인공 이인국이 일제식민시대에 제국대학 의대를 졸업한 의사라는 최상층 엘리트임을 나타낸다.

소설형식은 현재에서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회상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마무리를 맺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역사적 전환기에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주인공의 행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시간 흐름변화에 '회중시계'가 중요한 코드로 등장한다.

주인공은 의과대학 졸업식 때 받은 제국대학 문양이 새겨진 회중시계를 애지중지 하는데 시계는 그가 의사로서 위상이 만만치 않으며 변방인이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 개인적으로 상당한 노력을 했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그는 자신이 개업한 병원에서 가난한 환자는 외면하고 권력층과 부유층과 일본인들 만을 상대로 치료하면서 부를 축적한다. 해방 이후 친일혐의로 감옥에 갇힌 그는 러시아어 공부에 열중한다. 마침 감옥에서 이질발생을 계기로 능력을 인정받아 의무실에 근무하면서 소련군 의무관 혹을 수술 해주고 감옥에서 풀려난다.

그는 아들은 모스크바에 유학 보내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아들과는 연락이 끊기고 부인은 전쟁와중에 잃게 되지만 재혼해 서울에 정착 부유층과 권력층을 상대로 돈을 번다. 딸은 미국유학을 가 미국인 교수와 결혼할 예정이고 그 역시 미국 대사관을 통해 국무부 초청장을 손에 넣고 미국에서도 성공을 꿈꾸는 줄거리다.

일견 주인공 이인국은 격동의 시대에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살아온 인생 성공자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시류 변화에 따라 친일에서 친소로, 친소에서 친미로 노선을 갈아타면서 애국심이나 공공의 이익보다는 자기보신에 철저한 기회주의자이다.

최근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에서 대법원장을 지낸 '꺼삐딴 양'은 자신의 숙원사업인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권력심층부와 재판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삼권분립 사법부 최고기관인 대법원이 진실과 정의에 눈감고 전교조 법외노조, 통진당 해산관련 및 비례대표 지방의원 지위관련, KTX 승무원 해고소송 등 사회적 이슈와 관련해 권력심부와 사법거래를 했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의사는 연마한 의술로 신체 질병을 치료하고 법관은 법지식을 통해 사회정의와 인간양심을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권위와 신망을 받는 전문가라는 점에서 하는 일은 다르지만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의사가 인술을 베푸는 것보다는 수익향상에 관심을 가지고, 법관이 진리와 사회정의 보다는 권력눈치보기에 집중하는 것은 전문가 가치와 윤리에도 벗어나고 공공선에 크게 해악을 끼치는 일이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이인국은 "나보다 더한 놈도 더 있는데 뭘… 나쯤이야"라는 말로 '양심과 도덕'으로부터 일탈을 반성하기 보다는 자신의 기회주의적 삶을 정당화한다. 한국사회 여기저기에 '꺼삐딴' 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사회 상층부에서 무소불위 위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 우리 현대사의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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