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싣는 순서 |

1. 그 날 그 곳의 아픔을 기억하다
2. 멈춰버린 38년 그리고 68년
3. 역사의 현장에 서다 - 5·18현장의 역사와 현재
4. 역사의 현장에 서다 - 파도야 너는 아느냐, 갈매기섬의 한을
5. 나는 말하고 싶다 - 5·18 그 날의 진실을
6. 나는 말하고 싶다 - 68년동안 감춰온 아픔을
7. 진정한 치유의 출발점은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서부터

 

해남에서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부역 혐의와 보도연맹 사건, 나주부대 경찰 학살 사건 등 3가지로 분류된다.

지난 2008년 진실화해위에서 159명이 희생자로 인정받았지만 유족들은 부역자로 2000여 명, 보도연맹 사건으로 갈매기섬에서 700여 명, 나주부대 학살로 300여 명이 숨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역자의 경우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이 이뤄진 뒤 경찰과 우익청년단이 인민군을 도운 혐의로 이른바 부역자로 내몰아 수많은 사람을 재판도 없이 산과 들로 끌고 가 무참히 학살을 자행한 사건을 말한다.

보도연맹사건은 경찰이 1950년 7월 부산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좌익 관리대상으로 몰아 수감 중이던 해남지역 보도 연맹원들을 15일과 16일 사이 배로 이송해 진도에 있는 무인도인 갈매기섬에서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다.

나주부대 학살은 1950년 7월 23일쯤 부산으로 도망가던 나주 경찰부대가 해남읍 해리와 마산면 상등리 일대에서 인민군복으로 위장해 마을을 돌면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민군 만세를 외쳤던 주민들을 대검이나 총으로 무참히 학살하고 이를 항의하는 사람들도 끌고 가 사살한 사건을 말한다.

▲ 광주광역시 동구 월남동 김한택 씨.
▲ 광주광역시 동구 월남동 김한택 씨.

한국전쟁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부역자 피해 유족 김한택 씨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께서 30대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나는 두 살배기 갓난아이였다. 그래서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를 통해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송지면과 현산면 경계인 월송마을에 살았던 아버지는 당시 이장을 할 정도로 명성도 있고 부유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지고 인민군들이 이곳까지 밀고 내려와 총을 들이대며 돼지를 잡아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돼지를 잡아줬는데 이후 인민군이 물러가고 서울이 수복된 후 경찰들이 들이닥쳐 아버지를 포함해 마을주민 수십 명을 딱골재로 끌고 가 사살했다. 인민군을 도왔다는 부역 혐의였다.

당시 시신들은 머리에 총을 맞았고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서 손톱이 벗겨지고 손 지문이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손가락질을 피해 어머니는 자녀들을 외갓집이나 남의 집에 맡겨야 했고 그렇게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나는 어려서부터 외갓집이나 남의 집 살이를 하며 머슴살이를 해야 했고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해 글도 모르는 데다 부역 혐의 가족이라는 딱지 때문에 변변치 않은 직장도 구할 수 없어 구두닦이와 식당 일, 노동 일 등을 전전했다. 힘든 생활보다도 나를 더 힘들게 한 것은 배우지 못해 글자를 아직도 모르는 것이다. 전쟁만 일어나지 않았으면, 아버지만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안 됐을 것이다.

20대 후반에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고 살다 보니 정말로 먹고사느라 힘들고 바빠서 피해신청을 받는지도 몰랐고 하는 방법도 몰랐다.

혹시라도 자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해서 쉬쉬하고 드러내지 않아 왔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 그리고 나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꼭 진실이 밝혀지고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반드시 회복됐으면 한다.

왜 돌아가셨는지 이유라도

나주 경찰부대 피해 유족 박건삼 씨
(박 씨의 요청으로 사진은 따로 게재하지 않고 그의 증언만 아래에 기록한다.)

아버지께서는 젊었을 때 일본에서 공부도 하고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와 기계공장에서 기계를 깎고 기계를 만드는 선반 일을 하셨다고 한다. 나와 누이동생 그리고 어머니는 마산면 상등리에 있는 외가에서 지냈고 아버지는 인근에 있는 공장에서 생활하며 가끔 집에 들르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인민군복을 입은 나주 경찰부대가 어느 날 해남에도 들이닥쳤고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우슬재로 끌려가 다른 몇몇 사람들과 함께 무참히 살해당하셨다고 한다.

나중에 외삼촌이 말해주기로는 당시 나주 경찰부대가 인민군 만세를 외치던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했고 아버지의 경우 일본에서 여러 해 생활하느라 우리말까지 조금 서툴러 이것이 빌미가 돼 결국 우슬재로 끌려가 살해당하셨다고 한다. 그때 내 나이가 6살, 누이동생은 태어난 지 석 달 정도 된 갓난아기였고 아버지는 갓난아기였던 누이동생을 살아생전 딱 한 번 안아보고 변을 당하셨다. 그리고 아버지 유해도 찾지 못하다가 10여 년이 지난 후 우연히도 관계되시는 분으로부터 그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가묘를 쓰고 표식을 해놨다고 알게 돼 아버지 유해를 수습해 인근으로 이장하게 됐다.  

그 뒤 우리 가족은 대전 등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나는 가장으로서 힘을 쓰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만 했고 군 제대 후에는 하나님의 뜻에 이끌려 신학 공부를 하며 지금은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목회자로서 가해자가 누가 됐든 그들을 용서하며 살고 있지만 그 당시 우리 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돌아가셔야 했는지 꼭 밝혀졌으면 한다.

▲ 68년 만에 갈매기섬을 찾은 임영균 씨. (왼쪽)
▲ 68년 만에 갈매기섬을 찾은 임영균 씨. (왼쪽)

68년 만에 한 맺힌 섬을 찾다

갈매기섬 피해 유족 임영균 씨

내가 5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께 들은 얘기로 당시 30대 초반이였던 아버지는 계곡지서로 불려가 그 뒤로 면회도 거절되고 소식도 끊긴 채 다시 해남경찰서로 끌려갔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전쟁통에 어수선한 상황에서 죄가 없으니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아버지는 할 일이 있으니 불렀겠지 하면서 지서로 갔고 결국 갈매기섬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

같이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에 의해 아버지가 갈매기섬에서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과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일주일 뒤에 배를 타고 갈매기섬을 들어갔는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지천으로 쌓여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어머니는 지서로 불려 들어갈 때 아버지가 수건을 혁대에 매고 갔는데 한 시신에서 그 수건을 찾을 수 있어 아버지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워낙에 섬이 험난해 관을 못 가지고 올라가 각목과 밧줄을 이용해 시신을 수습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가족들은 주위 시선을 피해 고향을 떠나야 했으며 나는 학교도 못 다니고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하면서 힘든 생황을 이어갔다. 천신만고 끝에 지금의 우체국인 체신청에서 운전 일을 하며 가정을 이뤘고 벌써 큰아들이 40대에 접어들었지만 혹시라도 피해가 갈까 봐 할아버지 얘기를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있다. 아무 죄도 없이 아버지가 그곳으로 끌려가 돌아가셨고 남은 가족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쉬쉬하며 못 배움과 배고픔에 힘든 생활을 해 온 걸 생각하면 서글프기만 하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제대로 진상규명을 했으면 한다.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을 위한 인권·평화 공원 조성 필요

 
 

해남군 유족회 이창준 회장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 국가공권력에 의해 아무 죄 없는 민간인이 무참히 살해당했다.

전국적으로 114만명, 전남 22만명, 해남 2500~3000여명으로 추정된다. 해남에서도 집단 학살지가 마산면 붉은데기와 두드럭재, 계곡면 월암고개, 산이면 주산동 뻔지, 송지면 어불도 산진목, 북평면 딱골재, 화산면 나붓재 장고개, 옥천면 우슬재, 북일면 좌일잔등, 화원면 수동리 앞바다 등 10여 군데를 넘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있었기에 제1기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발족해 그나마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이명박 정부에서 위원회가 해산되고 과거사문제도 뭉개져 버렸다.

과거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는 과거 국가 권력이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살해한 것에 대해 희생자의 유족을 비롯한 국민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국가에 권고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희생자들을 위령하는 사업을 할 것을 함께 권고했다. 해남군에서는 2012년 이후 현재까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와 관련한 위령제도 사라졌고 집단학살지에 대한 표지판도 없는 실정이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해남의 민간인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평안히 영면할 수 있도록 해남에 인권·평화 공원 같은 추모공간 마련이 시급하다고 본다.

특히 전쟁이라는 무서운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이곳을 인권·평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 자라나는 후세에 인권이 보장되고 전쟁이 없는 나라에서 꿈과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진정한 평화의 시대가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국가가 잘못한 일에 유가족이 평생 고통 받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하기에 정부와 국회는 진실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해 특별법 제정에 신속하게 나서야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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