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이남곡 선생 인문특별강의 "비움과 채움"
21세기 마을공동체 형성을 위한 인문적 기반
배충진 기자  |  cj-bae@h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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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24  1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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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인문운동가 이남곡 선생과 함께하는 논어 다시 읽기 프로젝트 "비움과 채움"은 3월부터 12월 까지 15회기 교육을 통해 지역사회의 인문학 저변확대와 공동체성과 지역연대 의식 향상을 추구하고 있다.

8회차 교육은 전반기 교육을 마무리 하면서 "21세기 마을, 논어를 통해 그려본다"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최근 사회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얻고 있는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 사회적기업, 마을 만들기 활동을 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인문적 기반은 무엇인가 라는 강의 후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강연내용을 요약해 싣는다.

   
 

요즘 가장 뜨거운 화두(話頭)의 하나가 풀뿌리민주주의와 협치(協治)다. 서구에서 수입된 민주주의제도는 제도적으로는 어느 정도 틀을 갖추었지만 운영하는 사람의 의식(意識)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지역 자치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의식과 문화의 민주주의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국회나 정부, 정당과 같은 중앙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의 부재와 인식의 편협함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적 과제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이 일치될 때 국운은 융성한다. 산업화시대의 "잘살아보세"라는 욕망과 민주화시대의 '독재탈피 민주사회 건설' 이라는 지향이 명확했다면 21세기는 민주주의의 선진화와 인간화 즉 의식과 문화의 민주화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선진국 경제 따라잡기(catch-up)의 한계를 보이면서 진퇴양난의 위기상황에 처해있다.

마을과 지역이 한마음이 되어야 외연확대가 가능하지만 현실은 패가 갈리고 갈등이 분출한다.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사회 단위인 마을에서 풀뿌리민주주의와 협치는 어떻게 해야 발전할 것인가? 21세기 마을 만들기나 도시 공동체 형성운동의 지향과 발전방향에 대해 오랜 고전인 논어의 재발견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무지'와 '공공' - 소통과 협동의 출발점

인간은 다른 종과 구별되는 우수한 존재이기에 생명체 일반이 갖는 '자기중심성'보다 훨씬 강한 경직성을 갖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아집이라고 부른다. 공자는 무아집 같은 말은 한 적이 별로 없지만, 실제로 인간 관념의 함정을 정확히 보고 그것에서 해방되는 것을 관념의 정상화라고 보고 있다. 사람들과 집단들 사이의 대립· 분쟁, 종교·사상 간의 대립·분쟁 등이 이 관념의 정상화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마침내 밝혀 보리라"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제9편 자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제4편 이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다"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제2편 위정>

위의 세 문장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해석해 보면 "① 나(인간)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이다.(무지의 자각) 그러나 누가 물어오더라도(어떤 현실문제도 외면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나의 감각과 판단이라는 휠터를 거친 것으로 사실과 별개라는 자각을 유지하며(공공),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검토하여 밝혀 가겠다. ② 단정(斷定)이 없이 그 시점의 의(義)를 찾아 그에 따르겠다. 그러나 그 의(義)도 결코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③ 자기와 다른 생각은 당연히 공격 대상이 아니다. 오직 검토의 대상일 뿐이다.

즉, 오감을 통해 인식된 사물은 사실과는 별개라는 인식, 인간은 사실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무지(無知)와 내 생각이 틀림없다는 인식을 버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과는 별개로 나의 감각과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공공(空空)의 바탕에서 민주적인 소통·협의·결정 과정이 시작될 수 있다.

부와 예는 행복의 필요충분조건

공자께서 위나라에 가실 때 염유가 수레를 몰고 따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참 많구나" 염유가 말씀드렸다. "백성이 많아진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다시 여쭈었다. "부유해지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쳐야 한다"
子適衛 염有僕 子曰, 庶矣哉 염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제13편 자로>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제1편 학이>

첫째, 사람들이 모여 사회(마을)을 이루면 가장 먼저 그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특수한 사람을 제외하면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야 정신이 성숙할 수 있다. 물질적 수요의 충족(富)은 행복의 필요조건이다. 그 다음 이것이 정신적 성숙(敎)으로 이어져야 행복하게 된다.

둘째, 정신적 성숙(敎)의 목표는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貧而無諂),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는(富而無驕)'정도를 넘어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貧而樂),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富而好禮)'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셋째, 여기서 빈이락(貧而樂)은 가난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다. 불가피한 가난은 받아들이되, 정신적 예술적 가치를 즐기라는 말이다. 요즘 말로 하면 열등감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특히 현대의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삶을 의무나 사명감이 아니라 '즐기는(樂)' 것이다.

넷째, 부이호례(富而好禮)는 부유한 사람은 나누고 풀어놓는 것(禮)를 좋아하는(好) 것을 말한다. 우월감이나 비교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이다. '예(禮)'를 이렇게 해석하는데 의아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지금까지 가장 오해된 것이 공자의 '예(禮))'라고 생각한다.

다섯째, 이런 바탕에서 공자의 다음 말을 덧붙인다.

"나라가 있고 가문을 가지고 있는 자는 적음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않음을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음을 걱정한다. 대체로 고르면 가난함이 없고, 화합하면 부족함이 없고, 안정되면 기울어지지 않는다"

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제16편 계씨>

즐거움은 '충'과 '서'로부터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논어에 나오는 말이 있다. 사실 즐겁지 않으면 아무리 무슨 성과를 거둔다고 그것이 행복은 아니다.

경쟁은 생산력은 높일지 모르지만 엄청난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의무감이나 사명감으로 하는 것도 즐거운 것과는 거리가 있다. 14세기의 에크하르트라는 신학자는 거룩함을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자발성과 전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기쁨이다'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충(忠)의 상태이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최고의 덕목으로 서(恕)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공자의 도는 서(恕)와 충(忠)으로 일관되어 있다. 서(恕)는 상대방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제15편에서 한마디 말로 평생 실현할만한 것을 자공이 물었을 때 공자는 '서(恕)'를 말하고 그것은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말라)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함께 살아갈 때, 이것이 안 되면 자기 일에 기쁘게 전념(忠)할 수 없다. 또 반대로 자기 일에 기쁘게 전념할 수 있을 때, 상대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일관된 공자의 입장이다.

이처럼 논어에서 말하고 있는 이 세 가지의 인문적 기반에 확실히 근착하여 내부의 분열과 대립, 갈등을 극복하고 합작을 해나가는 것이 이시대의 핵심이다. 건강한 보수와 진보가 합작해서 의식의 선진화를 이루고 대기업중심 경제와 모방경제를 벗어난 물질적 생산토대의 재구축하고 양극화를 해소해 나가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요즘 농촌에서 일어나는 '마을 만들기'나 도시의 '아파트 공동체 운동' 등이 그런 방향으로 발전해야 지난 산업화 과정이나 민주화 과정에서 흘린 땀과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다.

 

   
 

인문운동가 이남곡 선생

· 전남 함평 출생
· 경기고, 서울 법대 졸업
· 불교사회연구소장(전)
· (사)아시아민들레센터 이사장(현)
· 연찬문화연구소 이사장(현)
· 전북 장수에서 귀농 공동체 활동
· <저서>'논어, 삶에서 실천하는 고전의 지혜', '진보를 연찬하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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