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변호사)

 
 

"함부로 실증을 경멸하지 말 것/세상의 소리 다 등 뒤에 두고/오직 연구실에서/중국의 고대와 중국의 현대가 다르지 않다./…/함부로 사실과 진실을 차별하지 말 것/오랜 사대주의 지나/한반도와/중국 사이 몇십 년의 단절을 지나 함께 물속에 대륙의 동(東)과 반도의 서(書) 어른거린다"

시인 고은 선생은 '만인보'에서 민두기 선생을 이렇게 노래했다. 지난 2000년 세상을 떠난 '동양사학의 총통' 민두기 선생은 1932년 11월 2일 계곡면 당산리 태인마을 824번지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사당 뒤로 울창한 동백나무숲과 대나무숲이 둘러싼 아름다운 집이었다. 본가는 당시 지명으로 해남면 백야리 542번지.

1945년 봄, 민 선생은 광주 서중학교에 입학했다. 기숙사에서 한방을 쓰게 된 형이 있었으니 당시 6학년(현재 학제로 고3)이던 윤홍하 형. 알고 보니 윤형의 시골집은 옥천면 백호리였다. "윤형의 얼굴 표정은 항시 온화하였지만 안경 너머로 번쩍이는 눈은 말할 수 없이 날카로웠다. 그와의 대화에서 그가 두고두고 강조한 것은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서는 그 수단이라는 것이었다"

서중을 졸업하고 나서 윤형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그해 초여름, 광주 충장로에서 대학생이 되어 돌아온 그와 마주쳤다. 이때 그가 가장 힘주어 강조한 것은 대학을 가려면 무슨 학과가 됐건 서울대학의 문리과대학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후일 우수한 정치학자가 되었을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6·25가 나던 여름이었다. 나는 해남읍의 집을 비우고 십 리 떨어진 히재마을의 큰댁으로 '피난'가 있었다. 어느 날 집을 둘러보고 오신 어머니께서 윤형이 찾아왔더라고 일러주셨다. 인민군 복장을 했더라는 것이었다. 자기 있는 부대로 찾아오라는 당부도 있었다. 나는 그가 가르쳐준 곳으로 갔다. 나에게는 피난처에서 나오지 말고 숨어 있으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이 기회에 러시아말이라도 공부해두라고 하였다.

내가 그 뒤 러시아말을 어설프게나마 공부한 것은 이때의 그의 권고 덕분이었다. 그날 그에게서 대접받은(그 당시로서는 무척 귀한 설탕물 한 대접) 그 맛이 그의 모습과 함께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날 그를 본 것이 내가 그를 본 마지막이었다. 그런 만남이 있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전쟁의 판세는 급격하게 변하였다. 홀로 집을 지키고 계시던 어머니를 찾아온 그는 후퇴하는 길이라 했다.

나를 만나지 못한 그가 우리 집 대문 밖 돌담을 돌아가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어머니께 당부한 것이 "두기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십시오. 제 몫까지 공부해달라고 하십시오"였다. 그의 말은 비록 일방적인 당부였으나 나에게는 그 뒤 평생을 따라다닌 약속이었고 멍에였다. 나의 공부 생활은 그의 몫까지 포함된 것이라는 '의무감'을 한시도 떨쳐 본 일이 없다"

민 선생은 윤형의 말대로 "문리과대학에 기를 쓰고 들어갔다." 그리곤 동양사학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다. 윤형은 어떻게 되었을까. "윤형의 최후는 지리산으로 들어간 대부분의 사람의 그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민두기 교수의 자전 수필선 '한 송이 들꽃과 만날 때'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책 뒤에 적어놓은 메모를 보니 98년 2월 9일 오후 4시에 완독했다고 적혀있다. 가장 존경스러운 대학자의 이야기요, 가장 슬프지만 가장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요, 한편 가장 아름다운 고향 어른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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