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청으로 가는 유바리 시내 간선도로변에 늘어선 빈집들.
▲ 시청으로 가는 유바리 시내 간선도로변에 늘어선 빈집들.

| 싣는 순서 | 

1_ 유바리의 우울한 현실
2_ 재정파탄의 최대 피해자는 시민
3_ 유바리 날개없는 추락 원인
4_ 관광은 하드웨어가 아닌 스토리텔링
5_ 지역의료와 복지 - 유바리모델의 진실
6_ 지역에 희망은 있는가 - 지역재생의 길
7_ 유바리의 교훈과 우리의 과제

 
 

구미 선진기술과 학문 ,제도를 수입하기 고용된 외국인으로 북방 홋가이도를 개척하기 위해 북해도개척사(開拓使)로 임명된 벤자민 스미스 라이만 (Benjamin Smith Lyman)이라는 미국인 지질학자가 1874년 석탄광맥의 존재가능성을 발표한 이후 1888년 반이찌다로우(坂市太郞)가 재조사를 통해 광맥을 발견함으로써 유바리의 탄광개발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는 미쓰이(三井) 그룹계열의 북해도탄광기선주식회사(北炭)와 미쓰비시(三菱)계열의 광업소를 중심으로 광산산업기계 제조, 코크스 및 화성품제조 산업까지 포함해 인구가 116,908명에 이르는 도시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이후 에너지가 석탄에서 석유와 전기로 전환되는 국가 석탄정책의 후퇴, 해외수입석탄과의 가격경쟁 및 잇따른 탄광사고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철강코크스용 등의 고품질탄 등으로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노력을 했으나 철강산업 불황 등으로 수요가 늘지 않아 1973년부터 탄광폐광이 잇따랐다. 1981년에는 북탄에서 운영하던 탄광(夕張新鑛)에서 가스누출사고가 발생하여 나중에 회사가 도산하는 등 석탄산업 쇠퇴가 가팔라졌다.

1973년 오일쇼크를 계기로 에너지위기 극복을 대의명분으로 내건 국내자원진흥책에도 불구하고 값싸고 질좋은 해외자원 수입여파로 기업들은 탄광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일본내에서 가장큰 규모와 탄질을 자랑했던 유바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1990년 미쓰비시석탄광업소의 폐쇄로 한때 24개소에 이르렀던 모든 탄광은 문을 닫게 되었다.

유바리는 원래 탄광개발로 시작된 도시로 석탄산업 이외에는 산업기반이 전혀 없었다. 석탄산업 붕괴이후 취업기회가 없어진 젊은이들이 도시로 유출되고 저출산 고령화가 심화되면서 인구가 급감했다.

탄광이 문닫으면서 광부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했던 병원, 사택 등의 시설물은 애물단지가 됐다. 시는 탄광회사가 남긴 토지, 건물, 병원등을 빚을 내서 사들였다. 이 같은 시설을 시가 떠안으면서 재정적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 40억 엔의 부채가 발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탄광기선주식회사(北炭) 도산으로 광산세 61억엔 마저 받을 수 없게 됐다. 광부용 사택 5천호를 시영주택으로 전환하면서 151억 엔의 예산이 소요됐다. 유바리시에서 폐광처리 대책비로 지출한 금액이 무려 583억 엔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리조트붐에 편승하여 투자한 건물이나 시설들도 시가 어쩔 수 없이 스키장이나 호텔을 매입하면서 부채가 늘어났다.

유바리시는 결산을 흑자로 전년도 결산을 정리하는 출납정리기간(4~5월)에 걸쳐 회전자금을 차입하여 결산상 적자를 메꾸었다. 일시차입금은 지방채보다 금리가 높고 적자폭을 확대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부채는 353억엔에 이르러 년간 세수가 10억엔 미만인 시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으로 결국 재정재건단체로 지정되어 재정운영이 사실상 국가 지도감독하에 놓이게 되었다.

 
 
 
 

시는 주민세등 주민부담을 최고액으로 인상하고 시의 출연기관, 도서관등 공공시설, 관광시설등이 폐쇄되었다. 대중교통의 경로우대가 없어지고 육아지원이나 복지서비스 및 각종보조금도 중단되었다. 시립병원은 의사1명이 근무하는 진료소로 축소되었다. 시공무원 역시 파산전 263인에서 100인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초등학교는 7개 학교가 1개 학교로 중학교는 4개 학교가 1개학교로 줄어들게 되었다. 통학버스도 없어져 일반교통을 이용해야 하는데 대중교통 운행 횟수도 줄어들어 버스를 놓치면 지각이 다반사가 되었다. 학부모들이 자녀를 등하교 시키는 부담이 늘어나면서 젊은 층의 인구유출이 늘어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세부담'은 가장 높고,'행정서비스 수준'은 가장 낮은 자치단체가 되면서 지역주민들의 삶의 질 또한 곤두박질쳤다.

 

| 유바리에서 만난 사람들 |

 
 

70년 전통 라면집 '논끼야' 야스다요우꼬(安田洋子) 할머니(75세)

유바리 시내에 활력이 없어지면서 문 닫은 가게가 많아 점심 먹을 집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시청뒤 영화의 거리 뒷골목에 위치한 70년 역사의 라면집. 가게 이름(のんきや)처럼 '편안한 가게' 였다.
아버지 때부터 시작하여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계속하셨으나 어머니도 몸이 아프셔서 그만둔 후 돌아가셨다.

결혼해서 도쿄 근처 사이타마에서 살다가 어머니 간병 때문에 돌아왔다가 뒤를 이어서 라면집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리는 5~6석 뿐이지만 유바리 판타스틱 영화제로 인연이 되어 일본 전국에서 찾아오는 팬이 있는 집이다.

가게 앞쪽 호텔에는 옛 기억으로는 주점이나 음식점 등 30개가 넘는 가게가 즐비했는데 옛날에 화려하고 북적이던 도시가 사람들이 없다 보니 아침에는 가게근처에서 산에서 내려온 사슴과 마주쳤다고 했다.

"치매에 걸릴까봐 제일 걱정이다. 유바리는 식사할 가게가 많지 않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일하겠다"고 하면서 밝게 웃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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