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감이 감도는 도시, 유바리

▲ 녹슨 육교 너머로 시가지 일부와 유바리시청이 보인다.육교 밑 광부들의 사택으로 쓰였던 아파트 단지는 비어있다. 외관은 깨끗해서 주민이 거주하는 아파트와 거주하지 않는 아파트를 저녁에 불이 들어오지 않으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 녹슨 육교 너머로 시가지 일부와 유바리시청이 보인다.육교 밑 광부들의 사택으로 쓰였던 아파트 단지는 비어있다. 외관은 깨끗해서 주민이 거주하는 아파트와 거주하지 않는 아파트를 저녁에 불이 들어오지 않으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 유바리시청 입구 모습.
▲ 유바리시청 입구 모습.
▲ 특이한 외형의 유바리역. 일요일 오후임에도 시내에는 인적이 없었다.
▲ 특이한 외형의 유바리역. 일요일 오후임에도 시내에는 인적이 없었다.

<편집자주> 일본 북해도 유바라시는 탄광도시로 한때 영화를 누렸지만 석탄산업의 붕괴와 방만한 시정으로 2007년 파산상태 재정재생단체로 지정되었다. 유바리시 현지취재를 통해 재정파산의 원인과 지역의 현실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살펴본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감소와 지역경제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의 미래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싣는 순서 | 

1_ 유바리의 우울한 현실
2_ 재정파탄의 최대 피해자는 시민
3_ 유바리 날개없는 추락 원인
4_ 관광은 하드웨어가 아닌 스토리텔링
5_ 지역의료와 복지 - 유바리모델의 진실
6_ 지역에 희망은 있는가 - 지역재생의 길
7_ 유바리의 교훈과 우리의 과제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유바리(夕張)시를 찾아가는 길은 기차나 버스의 운행횟수가 많지 않아 쉽지 않았다. 치토세 공항에 도착하여 미나미치토세 역까지 가서 갈아탄 유바리행 열차는 한 칸짜리 였다. 거리로는 그다지 멀지 않았으나 선로가 단선이어서 중간에 급행열차를 먼저 보내느라 20여분 정도를 기다렸다 출발하기를 반복하여 2시간여 만에 유바리역에 도착했다.

휴일임에도 열차안 승객은 10여명에 불과했는데 외지에서 유바리를 찾아온 기차매니어가 2~3명 타고 있었다. 그들은 열차안팎 풍경과 정차역을 영상에 담느라 분주했다. 내년 4월 1일부터 유바리 노선이 폐지될 예정이어서 요즘 폐지되기전 옛 추억을 살리거나 남기기 위해 기차를 타보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했다.

기차는 도착한 후 바로 5분여 뒤 기차매니어들 만을 태우고 다시 출발했다. 도착한 열차역은 무인역으로 유바리역은 교회건물 같은 외관을 하고 있어 특이했다. 기차역 대합실은 채 2평도 되지 않는 크기였다. 기차역내에는 레스토랑과 관광안내소겸 기념품 판매소가 들어서 있었다. 기차역 뒤에 들어선 커다란 스키리조트 건물에 기차역이 부속건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일요일 오후 4시반 경이 었지만 기차역 앞 시내에는 차도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리조트 건물 뒤가 바로 스키장이었으나 스키장 입구는 황량했다. 한때 휘황찬란했을 루미에나리는 녹슨 골조만이 남아 있었다.

인적은 드물었지만 깔끔했던 유바리역과는 달리 시청사 부근 까지 걸어본 시가지는 여기가 시내 중심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무너진 폐가와 빈집이 즐비했다. 시청에서 반경 500m에 폐교된 초등학교, 중학교가 있었다. 육교는 심하게 부식되어 있었고 길가의 아파트는 외관은 멀쩡했지만 사람이 살지 않고 있었다.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와 거주하지 않는 아파트를 저녁시간에 불이 켜지지 않으면 분간할 수 없었다. 사람도 차도 없어 활기없는 거리에는 하늘을 나는 까마귀 울음소리만이 유독 크게 들려와 적막감을 더했다.

유바리는 한때 탄광도시로 크게 번창했다. 그러나 '석탄에서 석유로' 국가 에너지 정책이 변환되면서 탄광이 차례로 문닫기 시작해 1990년 마지막 탄광이 문을 닫았다.

'탄광에서 관광으로'의 말로

유바리시는 나까다 데쓰지(中田鐵治) 시장이 1979년부터 2003년까지 24년이나 시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시 기획실장으로 근무하던때 1970년부터 석탄산업으로는 미래가 없다는 관점에서 탄광이 사양화, 쇠퇴되어가는 위기감을 갖기 시작했다. 부시장이던 1977년에 "탄광에서 관광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관광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고자 '석탄역사촌' 사업계획을 세웠다.

그는 1979년 시장취임이후 국가 에너지정책 전환으로 유바리가 희생되었으므로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국가 보조금을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한편 국가의 폐광대책자금 뿐만 아니라 민간자본과 빚을 끌어들여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제3섹터형태의 '석탄역사촌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탄광의 역사를 관광자원화 하기 위해 석탄박물관과 탄광박물관, 그리고 세계동물관을 비롯한 야외극장, 놀이시설 등에 투자를 해나갔다. 이런 투자는 1993년 유바리를 찾은 관광객이 231만명에 이르는등 성과를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유바리시는 국가와 민간부문으로부터 지역경제 활성화 모범사례로 꼽혀 각종 상을 휩쓸었다.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벤치마킹을 위해 찾아왔다.

그러나 충분한 사전 준비없는 무모한 투자와 사람들의 관심을 계속 끌 수 있는 지속성을 갖지 못한 사업들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관광객도 급격히 감소하여 석탄산업 만큼의 수익을 가져오지도 못했다. 보여주기식 무모한 투자는 부메랑이 되어 유바리시 재정을 심각하게 압박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24년간 재임했던 시장은 2003년 퇴임 후 그해 9월 간암으로 사망했다. 전시장 고교동창생인 후임시장 고도겐지(後藤健二)에 의해 2006년 유바리시는 시 재정규모 42억엔의 16배에 달하는 632억엔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재정재건단체 지정을 신청했고 2007년 4월 재정재건단체로 지정되었다. 결국 유바리시가 파산한 것이다.

파산은 심각한 휴유증을 몰고 왔다. 인구유출이 늘어나 파산전에 비해 1/3이 줄어 2018년 5월 현재 8,267명으로 일본에서 인구가 3번째 적은 시이며 고령화율은 50.5%(2017년 5월 기준)를 넘어서 일본내 최고 수준이다.

 

▲ 유바리시청 홈페이지의 빚 시계.
▲ 유바리시청 홈페이지의 빚 시계.

- 재정재건단체

재정적자가 심각하지만 자력으로는 적자해소가 불가능해 국가관리와 지원을 바탕으로 적자해소를 해나가야 하는 지방자치단체.

재정적자액이 표준재정규모의 5%(광역) 또는 20%(기초)를 넘어서 재정파산 상태로 재정재건계획을 수립 총무대신 동의를 얻어야 하며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신 재정자율권이 제한되어 예산편성 및 사업을 중앙정부 동의하에 추진하고 강제적인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2007년 4월 재정재건단체로 지정된 유바리시의 2018년 6월 20일 현재 채무잔액은 210억엔으로 2027년 3월까지 앞으로도 9년 동안 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빚을 관리하며 갚아나가야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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