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 외면받고 있는 갈매기섬

▲ 지금은 나무와 숲이 울창하게 뒤덮고 있는 갈매기섬의 모습.
▲ 지금은 나무와 숲이 울창하게 뒤덮고 있는 갈매기섬의 모습.
▲ 갈매기섬 해안가 바위에서 유족들이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 갈매기섬 해안가 바위에서 유족들이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 해양수산부 홈페이지에서는 경찰이 아닌 인민군이 이 곳에서 해남사람들을 처형했다고 잘못 설명하고 있다.
▲ 해양수산부 홈페이지에서는 경찰이 아닌 인민군이 이 곳에서 해남사람들을 처형했다고 잘못 설명하고 있다.

| 싣는 순서 |

1. 그 날 그 곳의 아픔을 기억하다
2. 멈춰버린 38년 그리고 68년
3. 역사의 현장에 서다 - 5·18현장의 역사와 현재
4. 역사의 현장에 서다 - 파도야 너는 아느냐, 갈매기섬의 한을
5. 나는 말하고 싶다 - 5·18 그 날의 진실을
6. 나는 말하고 싶다 - 68년동안 감춰온 아픔을
7. 진정한 치유의 출발점은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서부터

진도군 의신면에 있는 무인도 갈명도. 팽목항 육지로부터 22km가 떨어진 이 곳은 의신면 수품항이나 임회면 서망항에서 뱃길로 30분이 걸리는 곳으로 크기가 각기 다른 3개의 섬이 잇닿아 있어 멀리서보면 마치 갈매기가 날개를 펴고 있다고 해서 갈매기섬으로 불리고 있다. 바위산인데다 경사가 급하고 수십년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다보니 동백나무 등 다양한 나무 군락과 수풀이 섬을 덮고 있고 희귀식물, 해조류는 물론 희귀새들의 서식지와 이동경로로 자연식생 보전상태가 양호해 현재는 독도 등 도서지역의 생태계보전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 특정도서로 지정되어 있다.

또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포함돼 채취나 낚시, 입도(섬에 오르는 것)도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다. 섬에 버려진 듯 나뒹글고 있는 경고판은 다 녹이 슬고 글씨도 모두 지워진 상태로 여기가 어디인지, 어떤 장소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 곳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말 그대로 무인도이다. 그러나 이 곳은 보전을 위한 무인도라기 보다 역사속에서 잊혀지기를 바라는 버려진 땅 무인도이다. 진도군 홈페이지에는 갈매기섬에 대한 정보를 전혀 찾을 수 없고 해양수산부의 무인도서 정보조회를 통해 갈매기섬의 위치와 모습을 동영상 등으로 살펴볼 수 있지만 이마저도 이 곳을 '6·25때 인민군이 해남사람들을 처형했던 장소로 이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곳을 '역사적 가치 없음'으로 덧붙이고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올해 68년이 되고 있고 유가족들의 노력으로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해남지역의 민간인희생 사건과 관련해 갈매기섬 희생자 60여명을 포함해 모두 159명이 한국전쟁 전후로 경찰과 우익단체원에게 좌익이나 부역자라는 이유로 살해됐다고 진실규명 결정서를 발표한지10년이 흘렀지만 역사 속에서 계속 외면받고 있다. 같은 해 정부차원에서 유해발굴 조사를 통해 갈매기섬에서 유골 20여구를 발굴했지만 더 이상의 유해발굴도, 진실규명도, 추모사업도 멈춰버렸다.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들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이유에서다.

그 날의 진실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정부 조사와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갈매기섬 사건 이른바 해남보도연맹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경찰이 해남에서 부산으로 후퇴하는 길에 수감중인 보도연맹 회원들을 배로 이송해 진도에 있는 무인도인 갈매기섬에서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다. 갈매기섬은 그 한맺힌 장소인 것이다.

1946년 11월 해남에서도 화원면을 제외한 13개 읍면에서 1만명이 넘는 농민들이 추수봉기를 일으킨다. 해방이후에도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을 사찰하고 있던 친일경찰들의 척결과 미군정을 상대로 한 쌀 공출 반대, 소작농 해체 등을 주장했다.

이 때 상당수가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거나 산으로 도피했고 그렇지 못한 수백여명은 불순분자로 낙인이 찍혀 감시당하다 1949년 이른바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하게 돼 관리대상이 된다. 이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해 인민군이 물밀 듯이 밀려내려오자 정부와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을 도울 수 있다는 말도 되지 않은 이유를 들어 같은해 7월 12일부터 각 지서별로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15일 새벽까지 어선을 이용해 이들을 이 곳으로 끌고 온 뒤 무차별 총살을 가했다.

인민군이 해남을 점령한 때가 7월 27일이니 사실상 아무 잘못도 없이, 설령 잘못이 있더라도 재판 판결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무차별 학살을 한 셈이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해남군유족회 이창준 회장은 "수일동안 화산면 해창항과 송지면 어란항에서 갈매기섬으로 보도연맹원들을 끌고가 총살을 했는데 10명씩 한줄로 손을 묶은 채로 섬에 오르게 한 후 배에서 기관총을 쐈고 섬에 오르려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몽둥이로 때리고 대검으로 찔러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러 350여명에서 많게는 700여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해남 갈매기섬 유족회 회장을 지낸 오길록 씨는 "이 곳이 해남과 진도, 완도의 삼각점에 위치해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아무도 알 수 없게 이 곳으로 끌고와 학살을 한 것이며 특히 모두다 총살시키고 난 뒤 확인사살까지 했고 며칠 뒤 다시 와서 흰옷입은 시체들이 멀리서도 눈에 띈다는 이유로 불까지 질렀고 시체 수습을 위해 갈매기섬을 찾아온 유족들도 총을 쏴 학살했다"고 밝혔다.

당시 총살현장에 있었던 사람 가운데 산이면 금호리 출신 박상배 씨(고인) 등 3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왔는데 총을 빗맞아 목숨을 건졌고 섬에서 미역 등을 먹으며 생존하다 지나가던 배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됐다.

그리고 이들의 증언과 도움으로 이같은 학살이 드러나게 됐고 10여년에 걸쳐 유가족들이 개별적으로 수십여명의 유골을 수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68년만에 처음 올라보는 한 맺힌 섬 

"우리 아버지가 이 험난한 곳에서 돌아가셨다니 서글프고 또 서글프네"

"죽을 줄 알면서도 여기 바위에 우리 아버지가 올라서셨을 때 그 때 심정이 어땠을꼬"

지난 5일 갈매기섬 유족들과 해남군 유족회 회원 등 5명과 함께 갈매기섬을 직접 방문했다.

한국전쟁 68주년을 앞두고 현장을 방문해 그 날을 되짚어보고 그들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었는데 유족들의 탄식과 눈물이 흘러나왔다.

지금은 온통 섬 전체가 나무와 수풀로 덮여있고 경사마저 급해 장비 없이는 그 때 현장까지 접근하는 것 조차 불가능해 바닷물과 맞닿아있는 바위 위에서 제사를 지냈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임영균(72) 씨는 자신이 5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을 항상 품 안에 가지고 다닌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때 찍은 사진으로 이 사진말고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어머니께서 몇 년이 지나 나중에 알려준 얘기로는 계곡면에서 마을 이장을 했던 당시 30대초반였던 아버지는 어느 날 계곡지서로 불려가 그 뒤로 면회도 거절되고 소식도 끊긴 채 해남경찰서로 끌려갔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전쟁통에 어수선한 상황에서 죄가 없으니 가지마라고 말렸지만 아버지는 할 일이 있으니 불렀겠지 하면서 지서로 갔고 결국 갈매기섬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 같이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사람에 의해 아버지가 갈매기섬에서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과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총살이 있은 일주일 뒤에 배를 타고 갈매기섬을 들어갔는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지천에 쌓여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함께 갔던 사람들 상당수가 시신을 못 찾고 찾을 엄두조차 못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다행히 지서로 불려 들어갈 때 아버지가 수건을 혁띠에 매고 갔는데 한 시신에서 그 수건이 그대로 발견돼 아버지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워낙에 섬이 험난해 관을 못 가지고 올라가 각목과 밧줄을 이용해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가족들은 주위의 시선을 피해 고향을 떠나야 했으며 임 씨는 학교도 못 다니고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하면서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천신만고 끝에 지금의 우체국인 체신청에서 운전 일을 하며 가정을 이뤘고 벌써 큰 아들이 40대에 접어들었지만 자녀들에게는 할아버지 얘기를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있다.

68년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현장을 처음 방문한 임 씨는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냈다.

임 씨는 "아무 죄도 없이 아버지가 이 곳으로 끌려가 돌아가셨고 남은 가족들도 못 배움과 배고픔에 힘든 생활을 해 온 걸 생각하면 서글프기만 하다"며 "먹고 살기 바쁘고 힘들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피해 신청을 받는지도 알지 못해 신청마저 못했는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어 더욱 서글프다"고 말했다.

오길록(76) 전 회장은 당시 8살 때 24살이던 형을 잃었다. 당시 신혼이었던 형은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지만 경찰들이 다짜고짜 집안으로 들이닥쳐 연행해 갔다.

오 씨의 누이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이들은 누이에게 공포탄을 쐈고 더 이상 저항을 못하자 그대로 연행해갔는데 그 뒤로 연행된 형의 생사는 물론 행방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형의 죽음을 알 게 된 것은 그 뒤로 14년이 지난 1964년으로 갈매기섬 사건 때 구사일생으로 생환했던 고 박상배 씨의 증언으로 형이 갈매기섬에서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박 씨의 안내를 받아 형과 함께 마을 사람 10여명의 유골을 수습했다.

오 전 회장은 "당시 학살을 당한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대가 끊겼고 다른 유가족들의 경우 그 때 참상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마음의 상처와 수십년동안 고초를 겪은 연좌제 등 피해 의식 때문에 신고를 꺼려 해남에서도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가족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에 신고된 건수가 10% 정도에 그쳤으며 이가운데 일부만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오 전 회장은 "갈매기섬 사건을 비롯해 한국전쟁을 전후로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해 특별법이 제정돼 정부차원에서 다시 진상규명에 나서고 미신고자에 대해 추가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하며 미소송자의 경우도 재판청구권을 부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즉각적인 유해발굴과 추모공원 설립을 통해 아무런 죄도 없이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진상규명을 위한 법안은 지난 2001년 16대 국회부터 지난해 20대 국회까지 회기마다 발의가 됐지만 단 한번도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됐다.

정치권은 이 문제에 있어서도 진보냐 보수냐, 우파냐 좌파냐 등을 놓고 번번히 정치적 손익계산을 따져왔고 예산이 부족하다거나 피해자 범위를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법 제정을 미뤄왔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해남군유족회 이창준 회장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희생자가 해남에서만 최대 3000여명, 전국적으로 수십만명에서 100만명까지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의 활동마저 지난 2010년 종료됐고 이명박 정부 이후 더 이상의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국가가 잘못한 일에 유가족이 평생 고통 받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하기에 정부와 국회는 이와 관련한 특별법 제정에 신속하게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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